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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똥과 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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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까마득한 세월을 넘어 사람의 척추뼈 조각 하나가 내 눈앞에 있었다. 지난달 말, 평양의 '조선 중앙 력사박물관' 2층 고구려 전시관. 거무튀튀하게 탄화한 척추뼈에는 길이 9㎝, 가장 넓은 부분이 7㎜쯤 되는 화살촉 하나가 박혀 있었다. 동명왕릉 근처 옛 무덤에서 발굴했다는 이 유물 앞에는 별도의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았다. "온달 장군의 뼈라는 말도 있답니다." 북측 여성 해설원이 한마디 해주었다. 아, 이 뼈의 주인을 평강 공주가 부둥켜 안고 울었을 수도 있겠구나. 상상은 무한대로 뻗어갔다. 참관자들 사이에 그럴듯한 추측이 오갔다. 전투 중에 화살 맞고 숨진 고구려 귀족이 아니겠는가. 아니야, 순장당한 노예일 수도 있지. 순장이라면 그냥 산 채로 묻지 왜 활을 쏘아 죽였겠는가. 순장 직전 틈을 보아 달아나다가 추격자의 활에 맞아 숨진 건 아닐까…. 동행한 최종택 고려대 교수가 거들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드문 유물인 건 확실합니다."

평양을 방문하는, 아직은 흔치 않은 기회가 최근 나에게도 찾아왔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관계자들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익히 알려진대로 북한 측은 우리 역사의 맥을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여성 해설원도 "고려가 우리 반도를 통일했지, 신라가 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시된 유물도 신라.백제의 것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그러나 정작 낯선 것은 박물관 밖의 풍경이었다. 거리 곳곳에 눈길이 갈 만한 곳마다 버티고 있는 구호 간판들, 언제나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찬사로 말문을 여는 TV 아나운서들….

7박8일간의 '꿈'을 꾸고 서울에 돌아오니 '길찾기'라는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 두 권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보통시민 오씨의 북한 체류기'라는 부제가 달린 '남쪽 손님'과 '빗장 열기'였다. 한국전력 도서전력팀에서 근무하는 저자 오영진(34)씨는 2000년 8월부터 1년6개월간 북한 함경남도 신포지구 금호사무소의 원자력건설본부에서 일했다. 만화가이기도 한 그는 자신이 북한 체류 시절 겪고 느낀 것들을 상세히 메모해두었다가 두 권의 만화집으로 엮어냈다. 남한으로 돌아올 때 메모지를 압수당할까봐 양말 속에 숨겨 왔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지만, 비능률적인 일처리 방식이나 지나친 '정치성'에 대해서는 따끔한 지적도 아끼지 않았다.

책에서 기자가 가장 진하게 공감한 대목은 소똥에 관한 짧은 이야기였다. '길을 걷다 무심결에 소똥을 밟았습니다. 소똥을 밟으면 그날 재수가 좋다지요. 그런데… 소똥 밟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원래…소똥은 좀 묵직해야 제 맛 아닙니까? 길가에 싸놓은 묽은 소똥은 이곳의 어려운 식량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그래, 그곳에서는 쇠똥구리들도 살기가 고단하겠구나.

어제 인천에서는 '6.15 공동선언 발표 4돌 기념 우리민족대회'가 열렸다. 북측 대표 100여명도 참석했다. 서울에서는 6.15 기념 국제토론회도 열렸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현재의 좋은 흐름을 계속 끌고 나가 남북관계를 크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에 화답했다.

물론 북한에는 '묽은 소똥' 외에 '핵'문제도 있다. 또 6월에는 6.15만 있는 게 아니다. 6.25도 있다. 이들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6.15 선언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 이상으로 남북 사이의 다른 과제들도 빠른 진척을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