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현장@전국] “여기 제주! 평생 못 올 줄 알았는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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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제주도 섭지코지 해안. 때 이른 노란 유채꽃이 언덕 한 켠을 덮었다. 휠체어에 앉은 이정숙(53·강원도 원주시)씨가 도우미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흙과 바람, 눈앞의 바다를 느끼기 위해 꽃밭을 향해 힘든 걸음을 내디뎠다. 2월의 찬 섬 바람도 이씨의 산책을 방해하지 못했다. 이씨는 20세 무렵 척추 이상으로 두 다리가 마비돼 1급 지체장애인이 됐다.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포기했다. 10년이 지나 죽었던 신경이 조금 살아나면서 결혼했지만 신혼여행은 엄두도 못 냈다. 집 밖을 나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30년을 살았다. 지난달 지역소식지에서 장애인을 위한 여행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모험을 했다. 그런 이씨에게 제주 바다는 꿈 그 자체였다.

17일 오전 저소득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여행에 참가한 조영희씨(33·中)와 김송지씨(64·오른쪽 끝)가 전문 도우미들과 함께 제주도의 유명 관광지인 섭지코지 유채밭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제주=김경빈 기자]


푸른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는 예진(14)이에게도 제주도는 처음이다. 예진이는 초등학교 입학 후 근무력증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근육이 점점 퇴화돼 스무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다리를 못 쓰게 되자 예진이는 말을 잃고 마음을 닫았다. 보다 못한 아버지 황용삼(46)씨는 예진이를 위해 봉고승합차를 개조했다. 남들처럼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휠체어를 싣고 전국을 다녔다. 지난 가을에는 60㎏이 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설악산 울산바위에도 올랐다. 그런 황씨도 안전문제 때문에 제주도행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황씨는 “예진이에게 여행은 세상과 만나는 치료인데 이런 기회가 있어 반갑다”고 말했다.

16~18일 장애인과 노인 24명이 제주 성산일출봉에서 아침을 맞았다. 보건복지부가 사회서비스 사업의 하나로 운영 중인 장애인·노인 전용 여행프로그램(돌봄여행)을 통해서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여행은 여전히 현실과 먼 일이다. 소득이 적어 비싼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돈을 내도 받아주는 여행사가 드물다. 이번 여행은 돌봄여행 전문 업체인 R+(rplus-tour.co.kr, 1577-2558)투어가 맡았다. 여행 경비 42만원 중 장애인이나 노인이 19만5000원, 정부가 15만원, 여행사가 7만5000원을 부담했다.

‘돌봄여행’은 여행객 2.5명당 1명꼴로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 자격을 가진 전문도우미가 동행한다. 걷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은 1대1 도우미 서비스를 받는다. 예진이는 간호사 출신 유형보(34) 대리가 도왔다. 전문도우미는 출발 전 상담을 통해 건강상태를 꼼꼼히 챙기고 여행지에서 함께 먹고 자며 불편한 점을 살핀다. 지체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는 여행사가 준비한다. 답사를 통해 장애인이 이용하기 좋은 곳을 고르고 일반인보다 약한 체력을 고려해 일정을 짠다. 그동안 뇌졸중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 장애인 등 1300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복지부 사회서비스기반과 임숙영 과장은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숙소나 식당이 장애인 시설을 갖추는 등 사회환경이 변하는 효과도 크다”고 설명했다.

제주=김은하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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