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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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도리 없겠다는 생각으로, 그래 알았다,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사람은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상의 모든 고뇌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지상의 모든 고뇌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존재 - 진정한 개인이란 이 세계의 모순을 자신의 고뇌로 자학할줄 아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애의 혓바닥과 배타적인 이빨만 발달한 기형적인 개인들이 어찌 그와같은 자학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이본오가 오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나타날 게 뭐야?" 바를 사이에 두고 하영과 마주앉아 사이좋은 자매처럼 맥주를 마시던 정마담이 나에게 뭘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진토닉을 좀 진하게 달라고 하고 나서 나는 하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은 것이긴 했지만, 바 위에는 어느새 두 개의 빈 맥주병이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뭐가 더 좋았을 거라는 거지?" 담배를 피워물고 나는 정마담에게 물었다.

"흠, 오늘이 하영씨 생일이니까 인생 강의를 해 주려던 참이었지. 아니 인생 강의가 아니라 남자 강의라고 하는 게 더 낫겠군. " "정마담, 남자에 대해 뭘 아나?" 진토닉을 단숨에 반쯤 마시고 나서 나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라? 날 아주 우습게 보시는군. 내가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한 경력자라는 거 몰라? 그 정도면 남자들의 미주알과 고주알까지 다 알게돼 있어. 신물이 나서 그렇지.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무슨 궤변이야? 이혼을 세 번씩이나 했다는 건 정마담이 남자를 제대로 몰랐다는 증거이기도 해. 제대로 알았다면 한번의 결혼만으로도 족했을 거라는 거지. 안 그래?" 반쯤 남겨진 진토닉 잔을 마저 비우고 나는 빈잔을 정마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좀더 진하게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왜 그렇게 빨리 드세요? 가볍게 마시기로 했잖아요. " 하영이 바 밑으로 손을 뻗어 내 다리 위에다 손을 얹으며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술이 아니라 음료수를 만들어 주니까 그렇지. 이집 주인이 진과 토닉워터의 배합 비율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다리 위에 얹혀진 하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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