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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오지에 한국을 심는다]루마니아 크라이오바大 황국희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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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피원조국의 굴레를 벗어나 원조국으로 탈바꿈한 뒤 마침내 지난해 가을 선진국모임인 경제개발협력기구 (OECD) 의 회원국이 된 우리나라는 이제 바깥세상을 향해 베풀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됐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지난 91년부터 시작한 해외봉사활동은 아직 규모는 작지만 세계화로 나가는 가교 (架橋) 의 초석을 놓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향후 그 역할이 한층 기대된다.

"함께 잘 사는 인류사회 건설" 을 목표로 세계 각지에서 한국혼 (魂) 을 심고 있는 국제협력단 봉사단원들의 활동상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루마니아보다 더 아름답고 부자인 나라도 많지만 내가 가르칠 학생들이 여기 있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곳을 사랑합니다.

" 루마니아 크라이오바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한국국제협력단 (KOIKA) 의 해외봉사단원 황국희 (黃菊姬.29) 씨. 그녀가 96년 10월 '참혹하게 처형당한 독재자 차우셰스쿠' 를 떠올리며 도착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남서쪽으로 2백60㎞ 떨어진 크라이오바시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지 1년이 다돼 간다.

원래 산업도시인 이곳에는 대우자동차가 진출해 있다.

91년 전북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그녀는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를 생각하며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오지 (奧地)에서의 봉사활동을 택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젊은 시절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인데다 좀더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말로 가족들을 설득했다.

지난 6월 크라이오바대학측에서 한국어 강의를 1년 더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공산권 국가였다는 사회적 특성과 불안한 정치상황을 고려해 당초 1년 예정으로 온 곳이었지만 연장요청을 받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협력단본부와 상의해 봉사활동을 98년 10월까지 연장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현재는 인문대 학생들의 선택과목으로만 돼 있는 한국어지만 내년에는 정식으로 한국어과를 만들어 '한국어과 제자' 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그녀의 야심찬 계획이다.

그녀는 이 계획이 성사돼 한국어 교실이 확보되면 많지는 않지만 국제협력단으로부터 특별지원금을 받게 되기 때문에 무척 고무돼 있다.

이곳 대학측은 한국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어의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영문과의 에밀 시르불레스크 (49) 교수는 그 선봉장격이다.

그는 기자의 "부나지우아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에 "안녕하세요" 라는 또렷한 한국어로 응답하며 "닫힌 사회였던 루마니아에서의 동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로대 (대우자동차 루마니아 현지법인) 취직등 현실적 이유가 결합돼 있다" 고 한국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시르불레스크 교수는 내년에 한국어과가 생기면 학과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자신들을 '로마니아' 라 부르며 한때 전세계를 재패했던 로마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유럽 유일의 라틴계 국가 루마니아. 고색창연한 건물뒤에 숨어 있는 빈곤과 가난. 아메리카와 차이나는 알지만 코리아는 그저 '동양의 잘사는 작은 나라' 정도로만 알 뿐인 이들에게 黃씨는 한국어를 가르쳐야 했다.

지난해 10월3일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대학은 이미 새로운 학기를 시작해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한국어강좌는 공고조차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학생들 수업시간은 다 짜여져 있었고 한국어에 관심이 있어 온 학생들은 각기 다른 학과 학생들이라 시간을 조정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더욱이 안정적인 강의실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에서 떠나오기 전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학생모집과 안정적인 강의실확보가 최우선 과제였다.

대학측과 상의해 공고문을 작성해 붙이고, 강의실을 확보하고, 한국어강좌개설 행사를 열고, 30여명의 수강생과 상의해 시간표를 짜고, 교재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영어로 진행한다.

그녀는 학생의 대부분이 영어에 능숙한 학생들이어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학생들 실력이 향상되면서 한국어 사용비중을 늘려가고 있는데 언어교육의 바탕이 되는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 태극기를 보여주고 태극의 의미와 나라꽃 무궁화 등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지난 3월15일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점검하는 '제1회 한국어 경연대회' 를 열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면 바로 퇴근하고, 수업이 없으면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는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왔고 수업이 없어도 오후 5시까지는 반드시 국제교류과 사무실에 남아 있다.

혹 모르는 것이 있어 찾아오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학교 분위기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그리고 게을러지기 쉬운 자신을 채찍질 하기 위해서다.

커다란 세계지도와 한국전도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기숙사는 그녀의 또 다른 교실이자 학생들과의 대화장소다.

한달에 서너번 학생들을 이곳으로 초대해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서로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아직은 서투른 루마니아어를 섞어가며. 그녀는 학생들과의 거리감을 없애는데 가장 신경을 쓴다.

단지 교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일을 챙기는등 개인적인 부분까지 함께 나누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

인간적인 친밀함이 없이는 이들에게 한국어를 잘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단어 외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영문과 바시레 시모나 (19) 양은 "황선생님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 라며 열심히 공부해 한국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黃씨는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보단 우선 루마니아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잘 가르치고 한국을 알리는 것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 하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밝게 미소지었다.

크라이오바 (루마니아)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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