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출퇴근 ‘이것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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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기름값 덕분에 친환경, 웰빙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몇 해 전부터 새롭게 주목받는 교통수단이 있다. 바로 자전거다. 자전거 도로를 전국적으로 확충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발표가 나왔고, 자전거전용보험도 내놓을 예정이란다. 이런 기대감 덕분인지 입춘이 지나면서 한강시민공원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건 자전거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 이른바 ‘자출족’이다.
자출 2년차 직장인 정태일씨(30)는 그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는 64일간의 유럽 자전거 여행을 담은 <바이시클 다이어리>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나는 주 2회 자출을 원칙으로 하는 자출사의 불량(?)회원이다. 집이 있는 서울 한남동에서 회사가 있는 올림픽공원까지는 약 18㎞ 정도.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자출하기에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주 2회 자출이라는 소박한 계획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어떤 때는 월 2회 자출에 그친 적도 있었다.”

자출 1라운드 ‘공공의 적에 맞서다’

신의 직장이 아니라면 좀처럼 피할 수 없는 야근과 빠질 수 없는 단체회식이 자출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 하지만 자출을 가로막는 공공의 적(敵)은 ‘혼란스런 자전거 관련 법규’, ‘미비한 자전거도로’ 그리고 ‘자전거는 그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운전자들의 그릇된 인식’이라고 말한다.
정태일씨가 자출을 시작하게 된 건 충무로에 있는 회사를 다닐 때부터였다. 승용차로 가면 느긋하게 출발해도 단숨에 달려갈 거리이지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장 가까운 길은 남산 1호터널을 넘어 가는 것이지만, 매연으로 가득 찬 출근길에 남산 1호터널로 들어가는 건 금물이다. 급한 마음에 터널에 들어섰다가 대형버스가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귀가 떨어져 나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 마디 내지르고 싶지만 자전거에는 아기 손바닥만한 딸랑이가 있을 뿐이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가련하게 또는 한심하게 바라본다. 현행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자전거는 보도와 차도 중 차도(우선순위에 따라 하위 차선을 이용)로 통행해야 하는 교통수단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남동에 사는 정씨는 하얏트호텔 뒷길을 돌아 남산을 에둘러 40여분을 달려 사무실에 도착했다. 몸은 다소 지치지만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마치 새벽을 여는 커다란 노크처럼 들린다. 고속 주행을 한 날에는 가끔 종아리가 당기지만 ‘오늘도 지구를 지켰다(?)’는 뿌듯한 기분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자출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자전거를 무사하게 주차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자동차가 득실거리는 이 땅의 주차장은 자전거를 위한 좁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냥 전봇대에 묶어 두라고? 키가 그대로 꽂힌 승용차를 창문까지 열어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자전거를 짊어지고 사무실 옥상에 올랐다. “일본이나 유럽처럼 자전거주차장이 있다면 이런 수고를 덜 수 있을텐데…” 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자출 2라운드 ‘내가 자출했다는 걸 알리지 마라’

자출 2라운드는 자전거를 무사하게 주차한 다음부터다. 40여분을 달리고 땀을 식히려면 샤워를 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샤워실을 갖춘 회사는 별로 없다.
정태일씨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순식간에 간이 샤워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
자출사 게시판에 올라온 ‘샤워’ 에피소드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땀냄새보다 강한 향수로 온몸을 무장한다는 ‘퍼퓸족’ , 샤워기 꼭지만을 떼어 가지고 다닌다는 ‘깔끔실속족’, 물티슈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만을 닦아낸다는 ‘고양이족’까지 등장했다. 자출족들은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직장인 본연의 모습인 정장을 차려 입는다.
정씨는 나는 고양이족에서 깔끔실속족, 퍼퓸족으로 진화했다. 지금은 다행히도 샤워실이 있는 축복받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출하고 있다.

tip 자출족이 추천하는 샤워실 이용법

* 샤워실이 있는 직장이라면 미리 캐비닛에 속옷과 정장을 여벌로 준비해 놓고, 여유 있게 출근을 한 후 샤워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샤워실이 없는 직장이라면 주변의 헬스클럽에 등록하는 것도 좋다. 헬스클럽 주인과 잘 상의해서 샤워실만 이용하는 조건을 얻어 낼 수도 있다.
* 땀을 많이 흘린 상태에서 향수를 뿌리면 오히려 역한 냄새가 날 수도 있다. 미리 준비한 타월을 이용해 가볍게 땀을 닦아내는 편이 오히려 땀 냄새 제거에 도움이 된다.
* 샤워시설이나 화장실 사용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속옷을 갈아입는 것만으로도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2009년 ‘두 바퀴 테크’로 행복을 잡아라

자출족은 자꾸 달리고 싶다. 오늘은 얼마만큼 달렸는지 궁금하고, 내일은 어디로 달릴지 궁금하다. 이쯤 되면 ‘오늘 자전거를 타며 소모한 열량은 얼마였지’라는 궁금증마저 생긴다. 이럴 때 심박계와 속도계를 겸한 자전거용 GPS를 사고 싶어 자꾸만 인터넷 사이트를 뒤진다. 지름신이 강림한다. 20만원이 넘는 자전거용 GPS까지 질러버리고 나면 ‘우리 동네의 자전거도로 확충계획은 도대체 언제쯤 실현되나’ 궁금해지기 시작한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 출근길이 끔찍하게 느껴져 다시는 대중교통을 타고 싶지 않아진다.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싶어지며, 기름 한 방울도 태우지 않는 자신이 대견해진다. 이렇게 한 달만 자출을 하게 되면 고질병 같은 저질체력, 만성피로는 사라진다.
자출사 불량 회원인 그는 감히 말한다.
“기약 없는 주식투자보다 자전거와 함께 하는 ‘두 바퀴 테크’에 올인 하라. 2009년의 행복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온다.”

tip 정태일이 말하는 ‘자출’ 해야 하는 6가지 이유

* 남들보다 빠른 출퇴근으로 아침 시간을 벌 수 있다.
* 페달을 돌리며 매일 아침 열정으로 가득 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 불필요한 음주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생긴다.
* 운동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어 만성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전거를 10분 타면 41칼로리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 10㎞ 기준으로 한 대중교통 출퇴근 시, 연간 210만 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
* CO2를 발생시키지 않아, 본의 아니게(?)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다.

사진 제공 : 정태일씨
장치선 워크홀릭 담당기자 charity1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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