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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정조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를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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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조의 비밀 편지가 무더기로 발굴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무려 299통의 편지가 수신 일자까지 적힌 봉투째 그대로 발굴됐다니….

학술행사에 보고된 논문을 구해 읽어보았다 .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인물이 지금까지 정적으로 알려졌던 벽파의 대표 격인 심환지였고, 지금까지 실록 등을 통해 알려졌던 내용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조가 편지에서 보인 통치술이다.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즘이다.

정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꺾기 위해 심환지에게 연극을 시킨다. 정조는 자신을 음해했던 고모 화완옹주를 귀양보냈다가 사면시키려 한다. 왕실 강화 차원에서 왕족을 보호하려는 취지다.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서자 정조는 반대 잘하기로 유명한 심환지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행동요령을 자세히 알려준다. 다음 회의에서 강한 반대 의견을 밝힌 다음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파직시킨 다음 곧 복귀시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한다.

공식 기록인 실록에 따르면 심환지는 정조의 연출에 충실한 연기를 한다. 그러자 정조는 “우의정(심환지)이 지나치다. 파직하라”고 명한다. 임금이 직접 배우 노릇까지 한 셈이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정조가 진짜로 심환지를 싫어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정조는 자신의 신하들만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까지 속인 셈이다.

지금까지 정조는 벽파의 반대 세력인 시파를 총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정조는 비밀 편지를 통해 벽파를 조종했던 것이다. 정조는 비밀 편지에서 시파를 비웃으며 벽파를 부추겼다. 당파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해 심환지에게 이런이런 상소문을 올리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상소문을 올리려 준비하는 사람을 설득해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조는 비밀 편지에서 ‘경 같은 훌륭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심환지를 극찬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선 ‘심환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을 들었다놓았다 했고, 파벌에 따라 하는 말이 달랐다. 정조는 비밀 유지를 위해 편지를 반드시 없애라고 지시했으며,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표현을 쓰기도 했다. 능수능란한 밀실정치와 배후조종이다.

그렇다고 정조가 매사 맘대로 한 것은 아니다. 절대왕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참고 다독거려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편지에서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 밤에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새벽 3시부터 5시)이 지났다’며 분을 삭인다. 인사에 대해서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서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른 파벌의 인사를 다음에 중용할 것을 당부한다. 당파 간의 소통과 관계 개선을 위해 시파 채제공이 숨지자 심환지에게 조문 갈 것을 권하기도 한다.

정조가 비밀 편지를 활용한 것은 당파가 복잡하게 대립하던 정국을 매끄럽게 이끌어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파인 채제공에게도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채제공은 임금의 명에 충실해 편지의 대부분을 폐기한 것 같다.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조는 어느 한쪽을 무시하고 배척하기보다 양대 정파인 시파와 벽파를 적절히 활용해 견제와 균형을 취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신 서로 모르게 했다. 분할 통치다. 역사책에서 말하는 탕평책(蕩平策)이다. 요즘 말로 통합형 리더십이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돼온 마키아벨리즘 역시 위기 국면에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한 통치술이다. 정조는 어려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지는 충격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왕좌에 올랐기에 마키아벨리적 통치술을 체득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지도자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 이상의 큰 죄는 없다. 그래서 통치자는 사회 안정이란 선(善)을 위해 권모술수라는 악(惡)을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악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지만 더 큰 선을 위한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즘은 유효하다. 일반적으로 위기 상황일수록 마키아벨리즘은 유용하다.

정조가 구사한 마키아벨리즘의 핵심 수단은 비밀 편지, 곧 정보와 소통이다. 그 효율성은 역사가 입증한다. 정조가 불러일으킨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는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어 세도정치가 횡행하고 왕조는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요즘 정치인들이 모이면 정조의 편지가 화제라고 한다. 대통령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목마름이 느껴진다. 그래서 여당의 친이(親李) 중진의원에게 물었다가 면박만 당했다.

“그런 거 묻지 말고 기사로 좀 써주세요. 신문에 쓰면 대통령도 읽어볼 거 아니오….”

오병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