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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이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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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생이 다 소설이라지만 로널드 레이건의 일생이야말로 한 편의 소설이다. 가난한 시골 소년에서 할리우드 영화배우를 거쳐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그리고 알츠하이머병 증세로 인한 말년의 불행까지 그의 인생은 극적인 반전의 연속이었다. 지난주 있었던 그의 국장(國葬)은 소설 같고 영화 같은 레이건 인생의 피날레를 장식한 한 편의 잘 짜인 진혼 드라마였다.

국장 기간에 그의 시신이 안치됐던 워싱턴 국회의사당 홀을 찾아 머리를 숙인 일반 조문객은 10만명이 넘었다. 30도가 넘는 뙤약볕 아래 네댓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린 보통 미국 사람들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 망자에 대한 관대함으로 미국인들의 '굿바이 레이건' 열기를 다 설명하긴 힘들 것 같다.

미국의 주요 텔레비전 방송들은 운구와 영결식.안장식 등 국장의 거의 모든 과정을 연일 몇 시간씩 경쟁적으로 생중계했다. 막대한 수입을 포기하고 중간광고를 끼워넣지 않은 것은 예의를 감안해도 파격적이었다. 신문들은 매일 별도 섹션을 발행했다. 32년 만의 대통령 국장이라지만 레이건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비추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미 언론은 앞장서서 분위기를 잡았다.

현직 대통령인 조지 W 부시까지 43명의 역대 미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 3명을 꼽으라면 미국인들은 대개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꼽는다. 모두 전쟁 영웅이다. 워싱턴은 혁명전쟁, 링컨은 남북전쟁,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 역사에서 독립과 통합, 패권을 각각 상징하는 전쟁들이다.

루스벨트 이후 약 60년 동안 미 대통령 가운데는 뚜렷이 거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비명에 간 존 F 케네디는 거인으로 남기엔 재임기간이 너무 짧았다. 재선은 거인 반열에 들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레이건 외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리처드 닉슨.빌 클린턴이 있지만 결격사유가 명백하거나 역부족이다.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한 닉슨은 말할 것도 없고, 역대 대통령 중 지적 능력이 최고였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은 도덕적 하자가 치명적이었다. 레이건에 대한 미국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애도 열기는 냉전 승리의 공로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를 루스벨트의 뒤를 잇는 거인의 반열에 포함하자는 묵시적 동의로 보인다.

재임 중 레이건은 머리는 없고, 연기만 있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극단적 친기업주의와 무리한 감세정책은 군비경쟁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자의 원인이 됐고, 임기 말에 터진 이란 콘트라 스캔들로 도덕적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냉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비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에 대해 내려졌던 인색한 평가는 그의 태생적 기반에 근거한 바 크다. 그러나 죽음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클린턴에 이어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대립과 갈등의 리더십에 대한 미국인들의 실망감은 레이건이 보여준 타협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고 있다. 상대를 감싸안을 줄 아는 레이건의 포용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영결식 추도사에서 밝힌 대로 그는 반대자를 결코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정적들과 낮에는 사정없이 싸우다가도 오후 5시가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농담과 함께 악수를 청했다. 당리와 당략 때문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다툰다는 서로의 믿음이 전제됐기에 가능한 얘기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커뮤니케이터'였다. 레이건 애도 열기는 역설적으로 거인은 없고, 소인들만 설치는 오늘의 미국 현실에 대한 준엄한 경고인지 모른다.

배명복 순회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