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기업마다 이해 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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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계획과 달리 비정규직법 개정 속도를 늦추고 있다.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11일 비정규직법 처리 시점을 묻는 질문에 “가능하면 빨리 해야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만 했다. 당초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려고 했던 정부안에 대해서도 그는 지난 9일 “획일적인 해결 방법을 지양하겠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속도전을 강조해 온 한나라당이 속도 조절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초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비정규직법을 개정할 계획이었다. 오는 7월부터 고용기간 2년이 만료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대량 해고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책연대를 맺은 한국노총과 지난달 29일 협의회에서 첫 제동이 걸렸다. 장석춘 한국노총위원장은 “당정이 이 법을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투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임 의장은 “무리하게 강행 처리하지 않겠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법”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이후 한국노총과 한나라당은 비정규직 고용 현장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무팀을 꾸려 현장 조사에 나섰다.

실무팀은 4일과 5일 7개 업체를 방문해 인사담당자와 노조 간부, 비정규직 직원들을 만났다. 이와 별도로 5개 업체 인사 담당자를 추가로 불러 간담회도 했다. 하지만 접점을 찾지 못했다. 가 본 기업마다 사정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본지가 입수한 ‘비정규직 관련 현장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도 이 같은 차이가 확인됐다. <그래픽 참조>

◆“기간 연장되면 비정규직 고착화”=B은행은 비정규직 8000명이 창구 업무를 맡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노사 합의에 따라 5000명에 대해 임금은 정규직보다 낮지만 고용안정은 보장해 주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상태다. 이 기업은 올해 말까지 2300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추가 전환할 예정이다. 현장조사에서 노조는 “은행 업무의 특성상 2년마다 교체하면 숙련도에 문제가 생기니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지만 기간을 연장할 경우 4년마다 교체 사용하거나 기간제를 채용할 가능성이 크다”며 법 개정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D대학은 사측과 근로자측의 입장이 갈렸다. 인사담당자는 “법 때문에 숙련 인력을 교체하는 부담이 있어 기간연장을 해서 계속 고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 반면, 근로자는 “차라리 2년 후에 정확한 평가를 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주장했다.

◆“일자리 유지가 우선”=올해 11월 말에 계약이 끝나는 G카드회사의 기간제 근로자들은 “기간을 연장하면 계속 근무하면서 정규직 전환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신 “경기가 좋아지면 정규직화를 촉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낙농품가공업체인 F우유의 사정도 비슷했다. 회사는 “사용기간이 2년으로 제한되면서 인력을 검증할 시간이 부족했다”며 “연장한다면 계속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근로자도 “기간연장으로 일자리를 유지하다가 정규직 전환 기회를 갖는 게 더 유리한 것 같다”고 봤다.

임 정책위의장이 “업종과 숙련도에 따라 형편이 다양하다”며 “나이별·직군별로 비정규직 고용 기간을 차등하는 방안을 고민중”이라고 말한 데는 이런 까닭이 숨어 있었다. 조윤선 대변인은 “가능한 한 이번 주 내에 비정규직법의 개정 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량 해고 사태 방지와 비정규직 고착화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한나라당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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