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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혼이 없는 경제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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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경제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급격히 수리·계량화의 길을 재촉했다. 중요한 계기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 교수의 저서 『경제분석의 기초』였다. 경제학을 수학으로 간단명료하게 구성한 책이다. 그 이후 수학적 분석이 불가능한 연구는 갈수록 ‘비과학적’으로 취급됐고, 경제학자들의 경제사 경시 혹은 무시 경향은 강화됐다.

하버드대에서 경제사를 필수과목에서 폐지할 때에 교수·대학원생 합동회의가 열렸다. 한 학생이 일어나 발언했다. “경제사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공부해봤자 대학교수가 될 길이 점점 줄어들고, 상아탑을 벗어나면 더더욱 직장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버드대에서 벌어진 일은 그 후 ‘글로벌 스탠더드’로 전 세계에 자리 잡았다. 경제사가 필수과목인 대학들은 이제 별로 없다. 오히려 경제사가 아예 선택과목으로조차 없는 학교가 많아졌다. 싱가포르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각 나라 입장에서 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바람직한지를 따져본 뒤 결정된 일이 아니다. 학계가 상아탑의 자율성에 따라 굴러가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학자들의 연구는 학자들이 평가한다. 경제학자들 간에 수학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기다 보니 그것이 상승작용을 했다. 외부 고객들로부터 냉혹한 평가를 받고 고객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면 망하게 되는 기업 현실과 많이 다르다.

경제사 경시 경향이 사회에 가져온 부작용은 꽤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혼(魂)이 없는 경제교육이다. 역사 인식이 부족한 학생·교수들이 양산된다. 현실 경제가 어떻게 흘러왔고,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등을 고민하기보다 경제학 내의 기술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은 얘기하는데 경제 현실은 얘기하지 못한다”는 말도 이 와중에 나왔다. ‘경제성장론’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일반인이 “어떤 나라를 연구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론만 한다”는 답변이 돌아오는 일도 종종 있다.

경제 관료들조차 이런 경향에 노출된다. 1997년 한국 금융위기 대책을 진두지휘했던 한 핵심 경제관료는 이를 회고하면서 “금융위기라는 것을 처음 당했기 때문에 다소 허둥댔다”며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나 신자유주의라는 말도 처음 들었지만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한 유능한 경제관료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연수를 다녀온 뒤 “IMF 가서 보니 한국 경제가 IMF에서 조언해 주던 것과 완전히 반대로 해 성공했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사나 금융위기로 점철된 중남미 등의 경제사를 미리 잘 알았으면 좀 더 좋은 정책이 나왔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제 운용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강조되는 것도 경제사 경시의 부작용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수학처럼 전 세계에 공통되는 ‘정답’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서로 엇갈리는 세력과 견해가 뒤엉켜 흘러가고, 이를 해석하는 데도 서로 다른 견해 간에 치열한 투쟁이 전개된다. 이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나의 견해’를 갖는 것이 역사관을 정립하는 일이다.

정부는 향후 5년 동안 95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민경제교육’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실용성 떨어지는 학교 경제학 교육에 불만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가 내세우는 ‘경제교육 핵심 개념’이라는 것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것이 정부가 생각하는 ‘정답’을 국민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라면 시작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오히려 한국 현대경제사의 중요 이슈들을 놓고 건설적인 논쟁이 벌어질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 국민들이 이 과정을 통해 엇갈리는 견해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고 ‘나의 견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경제사를 이해하면 도그마에 사로잡혀 못 보던 이면들을 알게 되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사가(經濟史家) 에릭 홉스봄 교수는 “역사가들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