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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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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조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교해 구설에 오른 사람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었다. 그는 2004년 “정조가 노 대통령과 가는 길이 가장 비슷했다”며 “천도(遷都)는 권력 분산을 의도한 것인데 정조는 노론 세력이, 노 대통령은 보수 세력이 반대해 실패했다”고 말했다. 수도 이전 공약이 좌절된 대통령에 대한 위로였는지 아첨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노릇이지만, 정조의 개혁 이미지를 높이 샀기에 나온 발언임엔 틀림이 없다. 정조를 개혁 군주로 칭송하는 사람들도 1792년의 이른바 ‘문체반정’에 대해선 곤혹스러워한다. 정조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당시 유행하던 서책과 청나라 수입 서적들을 금서로 묶고 품격 있는 고문(古文)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강요했다. 연암은 일종의 전향서 격인 자송문(自訟文)을 모범적인 문체로 써내면 홍문관 대제학 자리를 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했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문체는 곧 사상이었음을 감안하면, 문체반정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겨우 싹트던 새로운 기류와 변화의 싹을 자르는 일종의 사상 검열이었다. 정조의 문체반정을 수구 사상의 산물이 아니라 탕평책을 위한 고도의 정치 행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문체반정의 물결이 휩쓸고 난 뒤 노론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정조의 지지자로 전향한 결과에 주목하는 시각이다. 채제공·정약용·이가환 등 미약했던 남인 세력이 정조의 옹호에 힘입어 제 목소리를 내게 된 것도 문체반정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9통이 200여 년의 먼지를 털어내고 엊그제 공개됐다. 이 편지들은 순정지문(純正之文)으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의 주창자가 쓴 글이라곤 믿기 힘든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시정의 속어나 속담, 한글과 이두를 섞어 쓴 표현도 적지 않다. 압권은 측근 신하를 ‘호종자’(胡種子), 즉 오랑캐의 씨앗이라 부른 대목이다. 이는 ‘호로자식’을 약간 점잖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원래 이 말은 병자호란 때 포로(胡虜)로 끌려간 여성들이 낳은 사생아를 비하하는 말이었으니 대단한 모욕이다. 근엄한 군왕의 육필 서한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휘 선택에 거침이 없었다는 점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공통점이 또 하나 늘어난 건 지 모르겠다. 여하튼 후인들은 ‘성군 정조’ 대신 ‘인간 이산’을 재발견하게 됐다. 읽는 즉시 파기하라는 어명을 어기고 심환지가 후세에 전한 덕분이다. 근엄한 이미지에 결과적으로 흠집을 낸 신하의 불충에 지하의 정조가 노여워하고 있을지, 너그러이 용서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