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이냐 아니냐식 잣대로는 진정한 경쟁력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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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08면

강제규(47·사진) 감독은 과작(寡作)이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년) 이래 메가폰을 잡은 영화가 놀랍게도 모두 3편뿐이다. 더 놀라운 건 매번 새로운 시도로 큰 흥행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쉬리’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전국 관객 1147만 명)로 또다시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신작을 할리우드에서 준비 중이다. 미국 LA에 있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쉬리’(244만 명·이하 모두 서울 관객 기준)의 대성공을 예상했나.
“그럴 리가. 직전에 ‘서편제’(103만 명·93년)의 기록은 독보적이었다. 사이에 징검다리가 없었다. 더구나 ‘타이타닉’(197만 명·98년)을 한국영화가 깬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개봉 때 관객수 맞히기 내기를 했는데, 많아야 80만 명을 썼다. 개봉 축하를 해주러 온 배우 신현준씨가 150만 명을 쓰자 난리가 났다. 감독한테 아부하느라 그런다고(웃음).”

-22억원의 제작비는 당시 사상 초유였다. 어떻게 투자를 받았나.
“처음에는 지방의 다른 투자사와 접촉했는데,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안 되나 싶어 삼성영상사업단에 시나리오를 보여 줬다. 최완(현 아이엠픽쳐스 대표) 이사가 곧바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추진력과 돌파력이 대단한 분이다. 그 자리에서 제작비 얘기까지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내가 ‘암만 알뜰하게 찍어도 23억원’이라고 했더니 ‘21억원에 맞추자’고 하더라. 기업 지원으로 절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쉬리’의 전산실 장면은 삼성SDS에서 찍었다. 당시 난제였던 헬리콥터 고공촬영은 삼성항공이 도왔다). 좀 초과돼 결국 22억4000만원이 들었다.”

-‘쉬리’는 남북 대치의 현실을 멜로·첩보·액션의 복합 장르로 풀어낸 점이 새로웠다.
“93년께 ‘은행나무 침대’의 시나리오를 중국에서 쓰면서 북한 유학생들과 어울린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영화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잘 모르지 않나. 신선한 체험이었다. 그 덕분에 남북 간의 멜로, 인간적 면모를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장르 중에는 첩보물을 아주 좋아한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에는 많이 등장했는데, 총이라는 매체를 통한 액션의 미학에도 개인적으로 갈증이 컸다(‘쉬리’는 실제 총기류를 미국에서 들여와 촬영했다). 발차기 액션 같은 건 선배 감독들이 많이 하지 않았나. 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만들지 않으니까 못 봤을 뿐 관객이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개봉해 성공을 거뒀다. 한류 붐이 일기 한참 전인데.
“‘타이타닉’을 깨니까 해외에 엄청나게 기사가 났다. 아사히신문과도 인터뷰를 했다. 그런 다음 수입업자들이 한국으로 찾아왔다. 일본 개봉 때 무척 화가 난 적이 있다. 마케팅 담당자가 영화는 재미있는데, 굳이 한국영화라는 인상은 주지 말자고 하더라. 세월이 지나니 이해는 간다. 이전에 일본 내 한국영화 관객은 소수 예술영화 매니어였다.”

-최근 한국영화가 침체기다. 제2의 ‘쉬리’ 같은 영화가 나오려면.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큰 예가 시나리오다. 한동안 우왕좌왕, 흥청망청하면서 대충 고쳐서 찍지 않았나. 30번이고 40번이고 고치면서 시나리오와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또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건 한국영화적인 것, 저건 할리우드적인 것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진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영화는 바다처럼 모든 걸 포괄하는 매체다. 누가 자기 것으로 만드느냐가 문제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새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준비 중인데.
“무조건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하려는 영화가 한국이나 아시아 시장 규모로는 안 되고,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니까 미국에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할리우드라는 데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그동안 할리우드 시스템을 이해하면서 시나리오를 많이 고쳤다. 올 초 시나리오 작업이 일단 끝났다. 한동안은 초조하고 의기소침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안정됐다. 시간에 연연하지 말고 하고 싶
은 영화를 끝까지 하자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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