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극비리 일본왕 만났다" 여연구 수기서 밝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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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몽양 (夢陽) 여운형 (呂運亨) 이 1940년 도쿄를 방문해 극비리에 일본 천왕 (天王) 을 만나 격론을 벌인 사실이 밝혀졌다.

47년 7월 19일 몽양이 혜화동 로타리에서 암살된 지 50년만이다.

이같은 사실은 여연구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96년 사망) 의 친필 수기 (手記) 인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에서 확인됐다.

본사가 중국의 한 학자로부터 입수한 이 수기는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해외에서 출판하기 위해 쓰여진 초고로, 지난해 9월 28일 呂씨가 '불의의 교통사고' 로 사망해 출판되지 못했다.

呂씨는 95년 7월에 쓴 수기 서문에서 "미숙하나마 아버지의 지향과 포부, 염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며 "지난 시기에 나간 아버지에 대한 글들이나 사실과 맞지 않거나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고 보충하고 싶다" 고 밝혔다.

이 수기에서 학계의 관심을 가장 끄는 대목은 몽양이 일본 천왕을 만났다는 사실. 몽양이 일본 천왕과 만났다는 소문은 해방 직후에도 풍문으로 끊임없이 떠돌았으나 몽양이 강력히 부인해 유야무야됐었다.

몽양이 40년 4월 도쿄에 간 것은 일본이 그를 "일본과 중국의 화평 (和平) 을 위해 중국에 밀사로 가 달라" 고 회유하기 위해 초청했기 때문. 呂의 수기에 따르면 육군성 병무국장, 전 수상 고노에 (近衛文磨) 등이 중국에 가 달라며 몽양을 설득했으나 거절당하자 천왕이 직접 몽양을 불렀다고 한다.

일본 천왕은 몽양을 만나 "중국에 간 나의 사신들이 무주고혼 (無主孤魂) 이 됐다.

일본사람을 보내서는 안되겠으니 나의 사신이 돼 달라" 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몽양은 "친일과 반일은 수화상극 (水火相剋) 이거늘 일본이 조선민족에게 큰 재난을 들씌우고 어찌 조선사람에게 친일을 설교하는가" 라며 거절했다고 수기는 밝혔다.

呂씨는 몽양과 천왕의 대화 내용에 대해 76년에 사망한 사촌오빠 여경구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여경구는 몽양이 천왕을 만날 때 통역으로 배석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과 대화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수기에는 해방후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몽양이 심열을 기울여 추진했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呂씨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몽양 암살의 배후로 당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 (張澤相) 을 지목했으나 심증만 밝혔을 뿐 뿌렷한 증거를 대지는 못했다.

呂씨는 몽양의 둘째딸로 91년 11월 서울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에 관한 토론회에 참가해 남쪽에도 잘 알려진 인물. 呂씨는 이화여전 (梨花女專) 을 다니다 46년 월북후 80년대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공동의장을 역임했고 90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재미교포는 "呂씨가 지난해 9월 28일 밤 친구 문병을 가다가 과속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고 밝혔다.

呂씨가 쓴 수기의 상세한 내용은 'WIN' 8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정창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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