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가입에 1시간10분이나” … 투자성향 높이기 편법도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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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통법 시행 첫날인 4일 한 투자자가 투자성향 등을 파악하기 위한 투자정보확인서를 작성하고 있다. 한 증권사 상담 직원은 “고객들의 투자성향을 제대로 상담하려면 상담 시간이 기존보다 두 배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김태성 기자]

이날 은행·증권사의 판매 창구는 바뀐 법과 절차에 익숙지 않은 탓에 곳곳에서 혼선이 빚어졌다. 첫날부터 각종 ‘편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자통법이 목표로 하는 투자자 보호 강화를 기존 판매 관행이 따라가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자본시장을 가르던 칸막이를 없애고, 규제를 완화하는 등 자통법이 몰고 올 변화에 대한 기대감도 나타났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32.17포인트(2.77%) 상승한 1195.37을 기록했다. 원화와 채권 값도 함께 오르며 ‘트리플 강세’의 ‘축포’를 쐈다. 자통법 시행으로 가장 수혜를 볼 것으로 기대되는 증권주는 이날 1.46% 올랐다.

◆창구는 아직 혼선=“또 긴급공지가 떴어. 공지가 한두 개도 아니고 계속 뜨니….” 여의도 A증권사 창구. 직원들은 본사에서 시시각각 내려오는 자통법 시행 관련 공지를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준비는 했다지만 고객들과 구체적인 상담이 시작되자 모호하거나 헷갈리는 부분들이 속출했고 본사로의 문의도 이어졌다.

고객도 늘어난 절차에 불편해했다. 이날 신한은행 본점에서 처음으로 펀드에 가입한 한 30대 남성은 “각종 설명을 듣고 서류를 작성하는 데 1시간10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투자자 정보확인서에서 분류된 그의 투자성향은 ‘위험중립형’이었다. 고위험 상품으로 분류된 주식형 펀드를 권할 수 없는 등급이다. 그는 ‘본인이 소신에 따라 결정했고 위험을 감수한다’는 확인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 은행 박지연 차장은 “각종 서류에 중복되는 문항이 많아 고객들이 힘들어 한다”고 말했다.

◆‘구멍’도 숭숭=“이래선 주식형 펀드를 권해 드릴 수 없어요. 본인 성향 평가란에서 ‘위험중립형’을 ‘적극투자형’으로 바꾸시면 가능해요.”

서울 용산구 B증권사 펀드 상담 창구. 기자가 ‘투자자 정보 확인서’를 작성하는 사이 판매 직원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투자자 정보 확인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도입된 핵심 장치다. 금융회사는 이를 근거로 고객의 투자성향을 판별한 뒤 그에 맞는 위험도의 상품을 권유해야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품 판매 관행을 막기 위해서다.

투자가능 기간을 표기하려 하자 판매직원은 “주식형을 사려면 3년 이상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코치해줬다. 확인서 작성은 주식형 펀드 가입조건을 맞추기 위한 ‘정답 표기’로 변질됐다.

여의도 C은행 판매 창구에선 ‘위험중립형’으로 판정된 기자에게 “적합한 상품”이라며 주식형 펀드를 권하기도 했다. 이 직원은 제대로 상품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설명 내용을 잘 이해했다는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달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일단 작성부터 하고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동떨어져”=다양한 ‘편법’이 등장한 건 제도와 현실 간의 거리 때문이다. 펀드 창구를 찾는 고객들은 주식형 펀드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특히 증권사를 찾는 고객일 경우 이미 주식투자에 경험과 지식을 쌓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향 분석을 해보면 절반 이상은 주식형 펀드 투자를 권유할 수 없는 등급으로 나온다. 신한은행 영업부 박용권 PB팀장은 “상당수 고객이 위험이 덜한 채권형 펀드를 권할 수 있는 성향으로 나오지만, 채권형 펀드에 가입하려 창구를 찾는 고객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제도적 ‘틈새’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우리투자증권 박종수 사장은 “오프라인 거래에 비해 온라인 거래에는 거의 규제가 없다”면서 “결과적으로 고객이 온라인으로만 몰려 투자자를 보호하자는 취지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증권팀 ,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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