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철학>졸부들의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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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승효상의 시공짚기''이동하의 역사읽기'에 이어'김영민의 문화철학'을 신설,3인의 필자로 문화칼럼을 엮어갑니다.

'김영민의 문화철학'은 매달 1~2회씩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세태와 사례들을 철학적으로 분석,해명하는 난입니다.

김영민 교수는 58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부산대 철학과를 나와 미국 드루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철학과 상상력''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등 많은 저서로'철학하기'와'철학적 글쓰기'의 새로운 스타일을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얼마전 떼지어 외유에 나선 고관 부인들이 고가의 사치품을 구입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당연히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심이나 언론은 그 사치품의 세목에 골몰했겠지만,

내 보기에는 오히려'떼지어 다니는

'행태와 그 사회적 생리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떼를 짓는'짓은 보리고개를 거뜬히 넘기고 마침내 세계 11위의 경제력을 지닌 우리가 우리 사회의 물량적 성장에 걸맞는 내실적 성숙을

이루고자 할 때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다.

그간 우리 근대화의 문제점을'과도.편파.졸속.농축'이라는 낱말로 간추린 지적이 적지 않았다.요컨대

규모나 외장(外裝)에 비해서 속이 우려할 정도로 곪아있다는 것인데,삶의 질을 가늠해주는 각종의 사회지표나 작금 우리 사회를 총체적

위기로 몰아가는 화근은 모두 이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테크노크라트나 기업인들은

인문주의자의 편벽쯤으로 치부하겠지만,우리에게 정작 시급한 미덕은 성급한 세계화의 수완이나 장치가 아니라고 본다.

소박한 비유지만,와병 중의 환자가 이웃집을 찾는 것은 사리는 물론이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짓이다.

우리가 각 개인의 성숙을 맹아로 삼아 공동체의 내실을 든든히 하는 심층 근대화,혹은 성찰적 근대화를 외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그 힘을 얻는다.'떼를 짓는'행태 속에는 결코'성찰'이 자리잡을 수 없다.

'떼를 짓는'모습이 어디 한둘이랴.유럽이나 동남아시아에서'떼를 지어'다니면 그것은 필경 한국인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면 으레 떼를 지어 삐삐를 차고

휴대폰을 휘두르는 모습에 놀라워 한다.떼를 지어 과외를 시키고 외국어 교습소에 몰려다니는 것도 한국인이다.

떼를 지어 단란주점이나 노래방을 습격하는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노래솜씨로 장관이라도 뽑거나 아니면 최소한 입사나 승진시험의 당락을 노래로 결정짓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떼지어 몰려다니며 국제적 망신거리를 자초하는 보신향략관광은 또 어떤가.

곰 발바닥과 웅담을 채집하는 여러 방식과 사례가 추한 한국인의 목록을 더하더니,뒤이어 마침내 정부에서는 웅담을 마약류와 같은 수준에서 단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쉽게,그리고 마음대로 떼를 짓는 것은 우선 모듬살이의 길이 되는 전통과 원칙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것은 우리의 근대가 국가동원 이데올로기의 그늘 아래 다양하고 건강한 사상사의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과도 통한다.개성도,성숙도,역사의 길도 망실한 채 타율적 선정주의,이기적 상업주의만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살림살이가 튼실하면 일개 집안을 둘러보아도 있을 것은 반드시 있을 데 있고 없을 것은 없으며,심지어 개나 말도 혈통과 계보가 있으면 그 음식에 나름의 메뉴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역사의 절맥(絶脈)이 드리운 그늘 아래 온갖 수입품들이 제철 만난 나비처럼 부유(浮遊)하고,그 외제의 거품 사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헤엄쳐 다니는 졸부들의 마을,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요컨대'잡탕 속의 졸부',바로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잡탕주의의 핵은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고,졸부의식의 핵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졸부의 가훈 중 으뜸은'우리는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졸부의 기반은 조급증이며,천민적 실용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없고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김영민 한일신학대 교수.철학

<사진설명>

철학적 상상력에 바탕,우리의 세태를 분석.비판해나갈 김영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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