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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보고세로읽기>문화.학문등 모든 영역서 무임승차 만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여당의 대통령 예비후보자들의 각축은 그 치열함만큼이나 독기

서린 말들을 뿜어내고 있다.

정치인 출신 주자들이 영입주자들에 대해 비난용으로 내뱉는 무임승차론이 그중 하나다.

그 말의 요지는 아마 우리는 한국정치의 진흙밭에서 소총수처럼 박박 기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영입주자 당신들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다만 밖에서 폼만 잡고 있다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들고 덤벼드는 공짜 인생들이 아니냐 하는 항변일 것이다.

무임승차론을 주장하는 몇몇 직업정치인이 과연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을 정도로

그간 정치를 제대로 했는지도 엄중한 추궁의 대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영 쓸데없는 말이 아니기는 하다.그런데

밑바닥,다시 말해 기초부터 시작해 그것의

자연스러운 숙성 결과로 주어지는 과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과실 그 자체만 따먹으려 드는 행태는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나 학문을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에 무수히 범람한다.

영화'쥬라기 공원'의 매출이익이 우리나라 자동차 1년 수출이익과 맞먹는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우리도 영상산업을 속히 육성해

떼돈을 벌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행정수반의 단순반응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기업이 몇년 전부터 영상산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투자보다 우선 달콤한 현금 수입이 보장되는 외화수입에 목매달고 있는 것도 예의 무임승차 혹은 공짜심리의 노골적인 사례다.

칸영화제에서 이란 감독 키아로스타미의'체리 맛'과 일본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뱀장어'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우리도 몇몇 영화제를 선별해 그 영화제에서 상을 탈 수 있는 영화를 집중제작하겠다고 한 대기업 영화사의 발언도 마찬가지다.영화제에서의 상을 마치 올림픽 금메달쯤으로 생각해 영화 쪽의'태릉선수촌'을 만들어 집중 훈련시키면 영화제 메달을 딸 수 있다는 발상이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오랜'토대 다지기'의 결과이지 속성재배를 통한 수확이 아니다.이 역시 과정은 생략한 채 오로지 결과로서의 메달만 바라보는 무임승차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소프트웨어의 생산능력이나 투자에 대한 고려도 없이 테마 파크를 지어 한몫 챙기겠다는 여러 지자체나 대기업의 발상도 그러하다.

학문 영역에서도 그런 공짜심리 혹은

무임승차론은 목격된다.근대 이후의 세계 정신사를

지배하던 서양의 사상 및 담론의

동요 앞에 이즈음 일종의 대안으로 활발히 제시.검토되고 있는 동아시아론이 그중 하나다.물론 동아시아론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런 문제의식을 벼리고 현실의 대안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 대단히 부실하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현대사상 연구의 추이와 성과에 대한 꾸준하고도 충분한 검토 및 상호연구 없이,단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동아시아론이 급조된다면 이 역시 상황논리에 편승한 무임승차다.이른바'대권'에의 욕망이 만들어 낸 무임승차론은 그것의 애초 용도를 벗어나 우리 사회의 급소를 깊숙이 찌르고 나아가 땅바닥 기는 소총수의 미덕을 새삼 되새기게끔 한다.망외(望外)의 효과인가?

이성욱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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