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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녹색뉴딜 또는 녹색빅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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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얼마 전 막역한 자리에서 지인이 ‘녹색뉴딜’이 뭐냐고 물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대답을 피할 수는 없고 해서 우스갯소리로 “원래 새 삽을 만들 때 녹슬지 않게 붉은 페인트를 칠하는데 이젠 초록색을 칠하나 봐”라고 대답하니 모두 웃었다. 기본 정책은 발표됐지만 연관효과를 극대화하는 후속조치가 이어지지 않으니 오해가 당연해서, 토건공화국이니 개발연대의 낡은 철학이니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녹색뉴딜 같은 정책은 미봉책이어서 오히려 수년 뒤에는 모두에게 짐이 될 거라는 말도 한다.

‘태양의 서커스’는 서커스를 하는 사람과 길거리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서커스단이다. 이들이 창작한 아트 서커스 ‘알레그리아’가 지난가을부터 올 초까지 서울에서 공연됐다. 예술계에 종사하는 후배가 관람을 권했지만 서커스나 길거리 예술은 철지난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일 뿐이라고 여겨 웃어넘겼다. 그런데 나중에 TV를 통해 보니 이게 웬걸? 알레그리아가 보여준 새로운 예술의 경지는 필자의 어리석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낡은 것들이 모여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외로 쉽게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넓은 길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경부고속도로를 봐도 그렇다. 혈혈단신으로 자수성가한 할아버지께서는 세상만사에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분인데도 경부고속도로에 대해서는 “그 좋은 논을 쓸데없이 길로 만드니 나라가 망할 일” 이라고 언짢아 하셨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이 극심하게 반대했지만, 농업국이던 우리나라가 산업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전기가 되지 않았는가? 낡고 우중충한 복개도로를 헐고 물길을 드러냈더니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지가 된 청계천 사업이나, 세계화를 앞당긴 올림픽과 월드컵경기장 건립은 기본적으로 토건사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과 길이 새로 열리고 시대를 상징하는 건물이 들어서게 되면 도시공간이 재편되고, 새로운 산업도 생겨난다. 새로운 가치관도 형성된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만 토건공화국 논쟁을 벌이는 것은 진부하다.

남녘에 가뭄이 심하더니 낙동강이 다이옥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남도지사는 부산시와 물 문제로 감봉 3개월을 자청했다. 40년 전 60만t이었던 우리나라의 하루 수돗물 사용량이 1700만t을 넘을 만큼 물 수요는 불어났다. 하지만 인구에 비해 강수량이 부족해 갈수기인 겨울만 되면 먹는물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낙동강 수계의 겨울가뭄은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만큼 예고된 일이었다. 대책을 세우려 해도 경상북도와 남도, 부산시의 이해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데다 오랫동안 굳어진 지역 이기주의 탓에 댐 하나 만들기도 쉽지 않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대개 낙동강 가뭄처럼 한 부서나 지역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이대로 나가자니 분쟁을 피할 수 없고, 그렇다고 손놓고 있으면 후발국의 추월을 피할 수 없으니 미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생명·안전·친환경 같은 미래 지향적 가치에 중심을 두자는 것이 녹색이요, 지역 이기주의나 기득권을 떠나 합리적이고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게 공공사업을 추진하자는 것이 뉴딜이라면 녹색뉴딜은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과거의 예로 보아 지역과 부서로 나누어 추진되는 녹색뉴딜로 국가의 미래를 도모하다가는 시행 과정에서 지역주의에 밀려 미봉책이 되기 쉽다. 이번만은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숨에 잘랐듯이 모든 부서의 정책을 종합하여 지역·계층·분야 간 불균형을 국가적 견지에서 단번에 녹여내는 녹색빅딜로 추진해야 한다. 물론 정부는 이 사업으로 이룰 수 있는 미래와 겪어야 할 고통을 국민에게 솔직히 알려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고통을 함께하고 있는 이번 경제위기는 역설적으로 일체감을 준다. 국민 대부분이 지금은 눈앞의 이익을 챙기기보다 세계에 내보일 새판을 짜야 할 때라는 데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경제위기야말로 과거의 덫에서 벗어나 새 시대로 발전하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설을 쇠었으니 봄은 코앞에 있다. 어려운 세계경제도 고비를 지나면 회복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간 고생하며 구조를 바꾸어온 덕에 우리 경제는 과거보다는 훨씬 날래고 단단해졌다. 곧이어 다가올 성장시대에는 새 이념으로 세계를 이끌 수 있도록 새로운 차원의 국가를 만들어 보자.

이정재 서울대 교수·지역시스템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