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스타 커플’의 메트로폴리탄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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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달 26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테너 롤란도 비야손(37)의 노래가 갑자기 끊어졌다. 고음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성악계를 제패할 인물로 꼽히는 성악가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비야손은 지난해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후계자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가수다. 호소력 있는 소리와 뚜렷한 개성은 그를 1년에 수십번 세계 주요 오페라 무대에 서는 테너로 끌어올렸다.

◆망가진 1등급 테너의 안간힘=문제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메리 짐머만의 연출이 처음 공개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결혼식 장면에서 생겼다. 이날 공연은 첫회였다. 그간의 무리한 스케줄과 계속된 스트레스를 이 실력있는 신예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몇몇 무대의 출연을 취소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던 터였다. 3막이 시작되기 전, 공연 스태프중 한 명이 무대에 섰다. 청중은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과연 비야손이 끝까지 다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비야손이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야손은 여러분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오늘 공연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힘든 결정을 한 가수에게 큰 박수가 터졌다.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한 비야손으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자신을 보러온 팬들에 대한 서비스였을 것이다. 다시 무대에 선 그는 좋지 않은 컨디션을 가까스로 매만져가며 이름값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 아리아 ‘머지않아 내게도 죽음이’에서는 치욕을 이겨내려는 한 가수의 마음이 들여다 보였다.

테너 롤란도 비야손(左),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제공]


◆힘겨운 시절 보내는 스타 커플=함께 무대에 선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37)는 뒤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었다. 고음이 점점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와 깨끗한 음성의 네트렙코 또한 현재 세계적인 수퍼스타다. 지난해 여름 아이를 낳은 것이 외신에서 상당히 큰 비중으로 다뤄졌을 정도다. 네트렙코는 출산 이후의 첫 무대로 이번 작품을 선택했다. 7개월 만에 무대에 선 네트렙코와 그의 단짝 파트너인 비야손의 빅이벤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29일 2회째 무대에 선 이 스타 커플은 여전히 힘든 모습을 보였다. 비야손의 음성은 자꾸 갈라졌고 네트렙코는 최고음을 한 옥타브 낮춰 부르는 안전한 선택을 해 실망스러웠다. 2005년 처음 호흡을 맞춘 이후 ‘오페라 커플’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 두 성악가는 각각 힘겨운 시절을 지내고 있는 듯했다.

진기한 무대를 보려는 청중의 반응 만은 뜨거웠다. 같은 극장에서 오른 다른 오페라 작품들에서 빈자리가 많이 보일 때 이들이 출연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만큼은 오래전부터 매진을 기록했다. 이달에도 계속되는 뉴욕 오페라 무대의 빅 이벤트에서 이 커플이 청중의 실망을 만회할 수 있을까.

뉴욕=장일범 (음악 평론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1880년 미국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협회가 조직돼 1883년에 문을 연 오페라 하우스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매년 220여 회의 공연을 소화할 만큼 미국에서 가장 큰 클래식 음악 공연 기구다. 1967년에 3800석 규모의 링컨센터 대극장으로 옮겼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와 최첨단의 공연 설비를 갖춘 오페라 극장으로 평가된다. 고정 오페라 팬 외에 뉴욕을 찾는 관광객이 손꼽아 찾는 클래식의 메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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