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사원 모두가 CEO 후보’ 유한양행의 무한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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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약업체인 유한양행에서는 요즘 후임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놓고 두 명의 부사장이 치열하게 경합 중이다. 영업을 총괄하는 김윤섭(61) 부사장과 생산·연구를 총괄하는 최상후(60) 부사장이다. 차중근 사장의 임기가 올 3월로 끝나기 때문이다. 후임 CEO는 등기이사 6명과 사외이사 2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재계가 연 매출 6000억원도 채 안 되는 제약업계 2위 기업의 차기 CEO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유한양행은 이례적으로 올해 40년째 전문경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가 “기업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개인의 것이 아니다”는 신념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다. 올해 후임 CEO가 선출되면 1969년 조권순 사장 이후 여덟 번째 전문경영인이 탄생하는 셈이다.

◆GE 선발 방식과 비슷=이 회사 직원은 누구나 ‘나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포부가 있다. 실제로 유일한 박사 사망 이후 현재의 차 사장까지 7명의 CEO 모두가 평사원 출신이다. 이들 중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CEO는 없다. 또 지금까지 1400여 명의 유한양행 직원 중 고 유일한 박사의 친인척은 한 명도 없다.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토대가 그만큼 탄탄하다는 얘기다.

CEO를 선정하는 원칙은 미국의 GE 방식과 비슷하다. 우선 회사 사정을 잘 아는 내부 인사 중에서 고르되, 두 명의 후보가 일정 기간 경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반드시 내부 인사로 CEO 후보를 한정한 이유는 속사정이 있다고 한다.

이 회사에서 정년퇴임한 추연수 전 홍보위원은 “유한양행은 대주주인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에 배당을 지급함으로써 공익사업을 지원하는 역할도 한다”며 “이를 위해선 회사가 내실 위주의 안정적인 경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행여 의욕이 넘치는 외부 인사가 CEO로 올 경우 위험천만한 고수익 사업에 손을 대 공익사업에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귀띔이다.

CEO 경쟁에서 낙오한 후보가 회사를 떠나는 것도 GE 방식과 흡사하다. 다만 GE의 CEO는 임기가 없지만 유한양행은 3년(한 번 연임 가능)이라는 점이 다르다. 현재의 차 사장도 2003년 선임된 뒤 한 차례 연임됐다.

◆평가 기준은 ‘정직·성실·신용’=평사원 누구나 CEO 후보가 되는 건 아니다. 이 회사는 업무능력 이외에 직급별로 정해진 교육학점을 이수해야 승진할 수 있다. 대리 이하 직원은 직급별 외국어 한 과목과 경영·회계 등 필수 한 과목을 들어야 한다. 고려아카데미컨설팅과 한국매니지먼트시스템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교육과정을 들어야 한다. 과장부터 이사까지는 직급별 외국어 한 과목과 직위별 필수 두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 임원이 되면 CEO 후보 자격이 주어진다. 사장은 업적과 역량을 기준으로 매년 두 차례 평가를 해 후계자를 가려낸다. 차 사장은 “임원 평가에서 가장 비중이 큰 항목은 ‘정직과 성실, 신용’의 유한 정신”이라며 “업무 실적이 부진한 임원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유한정신과 맞지 않는 평가를 받으면 제외된다”고 말했다. CEO감을 단기 실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달 이사회에서 사장 확정=유한양행의 대주주는 유한재단(15.5%), 미래에셋(11.9%), 국민연금(8.4%), 유한학원(7.6%) 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유한양행 이사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이사회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 전문경영인 제도가 마련된 이후 차기 CEO는 6개월∼1년 전에 대부분 내정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CEO의 임기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이례적으로 늦어지고 있다. 따라서 두 명의 공동대표 체제 또는 외부에서 CEO를 영입한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례가 없어 실현 가능성은 작다.

유한양행은 2007년 한미약품에 내줬던 2위 자리를 지난해 되찾았다. 영업을 총괄하는 김윤섭 부사장이 20% 이상의 매출 성장을 견인한 덕분이라는 평가다. 또 생산·연구를 총괄하는 최상후 부사장은 지난해 180억원의 ‘대박’을 터뜨린 레바넥스(위·십이지장궤양 치료제) 개발을 진두지휘한 공로가 있다. 최종 승자는 2월 이사회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지나치게 순혈주의를 강조하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경영을 펼친 결과 후발 제약사에 비해 성장이 더딘 것이 사실”이라며 “내부에서도 혁신에 대한 갈증이 커 차기 CEO 선정이 늦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유한양행=1926년 고 유일한 박사가 설립해 사회에 환원한 기업. 동아제약에 이은 국내 2위의 토종 제약사다. 지난해 5957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주요 제품으로는 ‘안티푸라민’(외용 진통소염제), ‘삐콤씨’(비타민제) 등이 있다. 약품 원료를 생산하는 유한화학과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유한메디카가 자회사다. 이 밖에 유한킴벌리(30%), 유한크로락스(50%), 한국얀센(30%), 한국와이어스(5%) 등의 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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