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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의 시네 알코올]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부르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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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07면

한국에 들어온 외국 영화의 대다수가 할리우드 영화이고, 그 안에서 미국인은 영국산 스카치위스키 대신 미국산 버번위스키를 마셔 댄다. 이 연재에 아직까지 술의 제왕, 스카치위스키를 쓰지 못한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엔 스카치위스키, 그중에서도 블렌디드 위스키다. 조니 워커, 발렌타인 등 한국에서 많이 마시는 위스키는 거의 다 블렌디드 위스키다.

- ‘뷰티풀 마인드’(론 하워드 감독·2001년)의 조니 워커

영국 스카치위스키법이 정하는 스카치위스키는 몰트(물에 담가 발아를 촉진시킨 뒤 말린 보리)를 기본 재료로 하되 다른 곡물을 첨가할 수 있고, 스코틀랜드의 증류소에서 증류한 원액을 오크통에 담가 스코틀랜드 안에서 3년 넘게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다. 알다시피 스카치위스키는 몰트위스키에 밀·호밀 등 다른 곡물로 만든 그레인위스키를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와, 오직 몰트로만 만든 위스키로 나뉜다. 후자 중에 한 증류소에서 나온 몰트위스키만 가지고 만든 걸 싱글몰트위스키, 여러 증류소에서 나온 몰트위스키를 섞은 걸 퓨어몰트위스키라고 부른다.

영화로 들어가자. 천재적 수학자 존 내시(1928~)의 이야기를 다룬 ‘뷰티풀 마인드’(론 하워드 감독·2001년)의 도입부. 프린스턴대에 들어간 청년 내시(러셀 크로)의 기숙사에 룸메이트 찰스가 나타난다. 술이 잔뜩 취한 채 내시에게 말한다. “어이 꼰대, 내가 차에 치였거든. 운전사를 봤는데 그 자식 이름이 ‘조니 워커’였다고.”
‘뷰티풀 마인드’는 학자로 명성을 쌓아 가던 내시가 정신분열증에 걸려 고통받다가 그걸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엔 현실에는 없고 오로지 내시의 환영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셋 나온다. 찰스가 그중 하나다. 찰스가 실제 인물이 아님을, 내시는 한참 뒤 자신이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알게 된다. 그러니까 조니 워커는 찰스가 아니라 내시가 자기 환영 속에서 불러낸 술이다. 왜 조니 워커일까.

(내시의 환영 속에서) 찰스는 문학도다. 수시로 내시에게 감정이 내키는 대로 세상에 뛰어들라고 부추긴다. 내시가 찰스를 만난 지 얼마 안 돼 그에게 말한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그랬어. 내 머리는 남의 두 배인데, 마음(heart)은 반쪽이라고.”

그러나 실제 내시는 마음이 반쪽인 게, 정서가 그렇게 메말라 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마음은 열정적이고 감성이 풍부한 찰스를 불러냈고, 그와 함께 긴 세월을 산다. 내시가 스스로 살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예술적 감성을 상징하는 게 찰스라고 한다면, 찰스의 술 조니 워커는 그 감성을 환기시키는 촉매제인 셈이다.

조니 워커라면 그럴 만해 보인다. 조니 워커는 19세기 후반 블렌디드 위스키를 영국은 물론 전 세계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당시 미국인에게 영국 문화의 품격을 나타내는 술로 여겨졌을 법하다.

원래 스카치위스키는 싱글몰트뿐이었고,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금이 워낙 비싸 생산이 활발하지도 않았다. 1820년대에 세법이 바뀌면서 글렌 리벳을 선두로 스카치위스키 상표 등록을 한 싱글몰트위스키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싱글몰트위스키들은 맛이 거칠다는 이유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영국 상류층은 브랜디를, 하층은 진을 마셨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인위스키를 첨가해 맛과 향을 부드럽게 한 블렌디드 위스키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기원인 존(조니) 워커(1805~1857)는 아버지가 스코틀랜드 킬마녹에 잡화상 하나를 남겨놓고 죽자 15세부터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곳에서 팔던 위스키들을 섞어 보기 시작했다. 죽을 때쯤 그가 만들어 팔던 블렌디드 위스키는 주변에서 인기 있는 술이 돼 있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워커는 위스키 블렌딩을 보다 전문화해 1865년 ‘워커스 올드 하이랜드’를 내놓았고, 마케팅도 본격화해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 술에 ‘조니 워커’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09년 조니 워커의 손자 알렉산더 워커 2세 때의 일이다. 이때부터 저 유명한 ‘활보하는 남자(string man)’의 로고와 함께 숙성 연도가 낮은 위스키 35가지를 섞은 ‘조니 워커 레드 라벨’과, 숙성 연도 12년 이상의 위스키 40종을 섞은 ‘블랙 라벨’(블렌디드 위스키의 숙성 연도는 배합한 위스키들 가운데 가장 숙성 기간이 짧은 위스키의 연도를 표기하도록 돼 있다)이 나왔다.

영화로 돌아와 내시의 환영 속에서만 존재하는 또 다른 인물 파처(애드 해리스)는, 내시가 펼쳐 보지 못한 꿈들 중에 모험, 즉 역사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모험과 관련돼 있다. 미국 정보기관의 비밀요원이라는 파처는 내시에게 소련의 핵 공격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미국 잡지·신문에 실린 암호를 해독하라고 지시한다. 내시는 암호 해독을 위해 갈수록 골방에 파묻히고 마침내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이 영화는 전기 작가가 쓴 동명의 책을 각색했는데, 내시가 동성애 편력과 유대인 혐오증이 있었고 정신병원을 나온 70년 이후엔 절대로 병원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빼 버리거나 왜곡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 영화가 갖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내시가 환영을 극복하는 방법은 여차하면 옆에 나타나 지시를 하거나 말을 거는 파처와 찰스를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실과 정신병원에서 인생의 상당 부분을 혼자 살다시피 한 내시에게 이들만큼 절친한 이도 없을 것이다.

영화는 파처와 찰스를 유령이나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어떨 땐 건조한 내시 주변의 실제 인물들보다 그들이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파처와 찰스가 떠나지 않는 걸 두고 내시가 말한다. “아마도 내가 아직 원하는 모양이지요.” 그럼에도 내시는 그들을 못 본 체하면서 대학 도서관에 처박힌다. 그런 내시에게서 살아 버티기 위해 지난날의 꿈을 접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내시는 60세가 훨씬 넘어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다. 시상식장은 그의 삶에 대한 위로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 구석에서 찰스와 파처가 내시를 담담하게 지켜본다. 내시도 그들을 보지만 잠깐뿐이다. 대화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쓸쓸한 위로다.

오래전에 명주를 만들며 창업 신화를 남겼던 여러 브랜드가 거대 기업에 합병된 것처럼 조니 워커도 스코틀랜드의 ‘디스틸러스 컴퍼니’라는 지주회사에 속해 있다가 86년 이 회사가 기네스에 팔리고 기네스가 합병해 디아지오를 만들면서 디아지오에 속하게 됐다.


임범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시네필로 영화에 등장하는 술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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