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빗장 풀리는 조짐인가 - 북한변화 의미와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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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은 지금까지 주체의 담을 높이 쌓아 외부의 개혁.개방 파고를 철통같이 막아왔다.

그러나 최근 국지적.부분적으로나마 개방확대와 개혁조치를 취함으로써 이것이 어디까지 이어질지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의 조치들은 심각한 식량난 속에 나온 것이어서 외부와의 담을 허무는 대대적 탈바꿈 작업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냐는 희망적 관측까지 나오는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최근의 변화들이 고육책으로 나온 조치거나 식량난에 따른 자연발생적 현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진.선봉지구의 전면적 자본주의 방식 채택만 해도 그렇다.북한은 그동안 중국식 전면 개혁.개방을 극히 꺼려왔다.정권에 결정적 화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선 외국기업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이번에 태도를 바꿨다.어찌보면 내키지 않는 몸짓이다.

반대해오던 4자회담에 호의적 태도를 보인다든지,남북적십자 접촉에서 대북 지원물자 직접 전달에 합의하는등의 유연한 태도 역시 그동안의 기세와는 사뭇 다르다.남한 당국을 배제한 상태에선 어느 것도 달성될 수 없다는 현실이 기존의'남한 배제,미국과만 대화'하겠다는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의 틀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농민시장의 급증과 공산물 거래는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주민들의 자구책이다.통행제도 완화는 먹거리를 찾아 이동하는 주민들을 통제할 수 없어 취해진 조치임에 틀림없다.

식량배급체계가 사실상 와해되자 당국이 이를 현실적으로 수용,각급 단위에서 식량자급을 위한 활동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현상들은 북한 지도부의 통제력이 그만큼 힘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더 큰 문제는 이러한 조치들이 가져올 파급효과다.나진.선봉 개방과 관광확대등은 그들이 가장 꺼려온 외래 사조의'오염'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상대적 빈곤에 눈뜨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또 인센티브제를 노린 분조단위 축소나 농민시장은 사유재산에 대한 매력을 부추길 수 있다.이같은 현상들을 종합하면 북한사회의 높은 둑은 여기저기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게도 한다.

그러나 김정일(金正日)이 체제를 완벽하게 장악했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군부중심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북한사회 전반에 걸쳐'혁명적 군인정신'을 요구하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김정일이 처한 딜레마.개방하자니 내부 와해가 우려되고,폐쇄정책은 경제파탄이 불보듯 하다.북한이 기존의 이념.체제를 유지하며 경제회복을 꾀할 수 있을지 현재로선 점치기 극히 어렵다.다만 개방의 속도가 음양으로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만은 분명하다. 김성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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