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금융위기가 ‘천재지변’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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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예측하지 못한 세계적 금융위기 등으로 인수합병(M&A)이 잇따라 중도 파기되면서 이행보증금 등을 둘러싼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대우조선해양과 쌍용건설,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 인수를 각각 추진하다 포기한 한화그룹·동국제강·강호AMC가 이행보증금 등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수 포기 업체들은 자신의 책임보다 어쩔 수 없는 외부 상황 변화로 중단됐기 때문에 이 중 일부라도 돌려달라는 요구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자본주의의 계약원리에 어긋난다”며 한 푼도 내줄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이다. 이에 따라 법원은 “돌발적인 세계적 금융위기를 M&A 협상 파기의 주된 요인으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을 떠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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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적 상황’ 여부 판단이 관건=한화는 지난해 11월 대우조선해양 채권단인 한국산업은행과 매매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뒤 납부한 이행보증금 3000억원을 되돌려받겠다고 나섰다. 산업은행이 22일 MOU가 해제됐음을 공식 선언하자 한화는 이튿날 긴급 이사회를 열어 소송을 하기로 결정했다.

산업은행은 이행보증금을 양해각서에 따라 몰취해 기업 지원 자금으로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영조 한화 상무는 “3000억원이면 그룹 전체 순이익의 30%에 해당하는 돈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에 꼭 필요하다”며 “금융위기라는 외부 요인을 반드시 고려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 상무는 “조선 경기 불황으로 신규 수주가 없는 데다 기존 수주까지 취소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반대와 산업은행의 비협조로 실사를 못했다”며 “법무법인에 자문한 결과 상당액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응답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쌍용건설을 인수하려다 지난해 12월 한국자산관리공사로부터 MOU 해제를 통보받은 동국제강 역시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동국제강은 이행보증금 231억원을 내고 실사까지 마쳤다. 하지만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다 본 계약을 1년 유예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매각의 공정성을 이유로 자산관리공사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익명을 요구한 회사 관계자는 “이행보증금이 단돈 1원일지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주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며 소송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는 “정밀 실사를 천재지변에 준하는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지난해 9월에 했고, 그 자료를 토대로 인수작업을 해왔는데 이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을 인수하려던 부동산 개발업체인 강호AMC도 전략적 투자자를 끝내 찾지 못해 계약금 580억원을 날렸다. 이 회사 역시 세계적 글로벌 금융위기가 큰 원인이라며 싱가포르 개발회사인 CDL을 상대로 계약금 반환 소송을 낼지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계약 원리 훼손인가=법률 전문가들은 인수를 중도에 포기한 업체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양규응(법무법인 봄) 변호사는 “금전적인 채권·채무와 관련해서는 국가가 부도가 날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협상 파기의 사유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설현천(법무법인 LAW25) 변호사는 “외부적 요인이 발생했어도 매각 주체자가 고의성을 가지고 그 위기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게 입증돼야만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오석준 공보판사는 “기존 판례들은 해당 기업의 주장에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1963년 매매계약과 잔금을 지급하는 기간 사이에 화폐가치의 변동이 극심하더라도 그 계약을 해제하지 못한다고 판결했다.

연강흠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애초 MOU를 작성할 때 ‘경기가 급속히 나빠질 경우 계약사항을 변경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계약상의 조건을 무시하고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준다면 자본주의 계약의 기본 원칙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설명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예측하지 못한 금융위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법률 공방이 예상되지만, 미국 등의 판례에서도 지진 등 자연적 재해가 아닌 이상 계약을 변경할 수 있는 사정 변경의 사유로 인정한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사 출신인 곽내원(법무법인 한승) 변호사는 “이행각서 등이 파기될 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았다면 세계적 금융위기가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그는 “법원이 대법원 판례와 어긋나는 판결을 하기보다는 조정하려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문병주·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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