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어려울 때 더 필요한 예의와 염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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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예상은 했지만 너무 가파르다. 어제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난해 4분기 실질성장은 -3.4%(전년 동기 대비), 엊그제 KDI(한국개발연구원)가 내놓은 올해 경제성장 예측은 상반기 -2.6%, 연간 0.7%다. 생산·재고 순환은 안으로 감돌면서 완연한 침체 기미를 보이고 있고, 당연한 결과지만 신규 취업은 지난해 12월 결국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더 많은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경제는 아직 내리막길이다. 이럴 때 다시 생각나는 게 예의와 염치다.

내일부터 실질적인 설 연휴가 시작된다. 일가는 물론 가족조차 한데 모이기 힘들어진 세월의 변화 속에서 그래도 서로의 핏줄을 확인하며 정을 나눌 수 있는 많지 않은 기회다. 해도, 어떤 연유에서건 적잖은 사람이 설 같은 명절을 부담으로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살기가 어려워질 땐 더욱 그렇다는 걸 우린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고향 부모님을 찾아뵈면서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고 여유가 되면 용돈이라도 드리는 것, 가족 성원으로서의 예의다.어깨 뻐근하고 기름내 거슬려도 만두 빚고 전 부치며 명절 음식 만드는 것, 또한 예의다. 하지만 예의는 염치와 짝을 지을 때 더욱 빛난다. 선물·용돈이든 음식 준비하는 노력이든 알아주고 애썼다 한마디 해주는 것이 염치고, 화투패나 술잔 놓고 거들 일 찾아보는 것 또한 염치다.

경제가 어렵고, 그래서 살림이 팍팍해지면 마음 또한 각박해지기 쉽다. 아무리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평소엔 그냥 넘겼던 말 한마디가 괜히 서럽고 핀잔 하나에도 더 울컥해지기 쉬운 것, 그게 어쩔 수 없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마음은 부모·자식 간이든, 부부 간이든, 또는 고부간이건 다를 게 없다. 어려울수록 필요한 것이 가족 간의 정이라고들 말한다. 그 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 예의고 염치다. 서로의 흠을 잡기보다는 서로가 노력하고 그런 노력를 헤아리는 것이 예의고 염치다. 배우자의 무능을 탓하고 부모·자식을 원망해야 간극만 넓어질 뿐이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쟁의발생 결의를 했다. 물론 주간 2연속 교대라는 노사 합의의 새로운 제도 시행을 앞두고 사측이 이를 지키지 못하게 된 데 원천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 세계 자동차산업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기득권만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협상전략적 차원의 결정이라 한들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11년 전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 이구동성으로 일자리 나누기, 일거리 나누기를 강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다. 문제는 이를 실천할 방도고 그 중심에 대기업 노조가 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이들이 기득권에 몰입하면 할수록 울타리 밖에 자리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중소기업에 미치는 압박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려면 일정 부분 상대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그게 사회에 대한 예의고 염치다.

공기업들이 요즘 일자리 지키기를 빌미로 개혁작업을 유야무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염치 없기는 마찬가지다. 민영화를 골자로 한 개혁작업이 공적 독점에 따른 폐해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며, 새로운 사업 기회와 성장동력을 모색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철밥통 좀 줄어드는 걸 앞세워 딴죽을 거는 것은 공기업 개혁을 바라온 대다수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며칠 전 새로운 경제팀이 내정됐다. 진용으로 볼 때 청와대가 여론을 들으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초기 내각 구성이 독선적 판단과 권력 배분에 집착한 염치없는 인선으로 비쳤다면, 최소한 이번 경제팀 인선은 개인적 부채보다는 신뢰 회복이 먼저라는 국민과 시장에 대한 당연한 예의였다고 본다. 그렇다면 현 경제팀 경질을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새 경제팀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야당도 청문 절차를 빨리 진행해 혼선을 막아주는 것이 예의다. 경제대책과 관련한 부수 법안의 조속한 통과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권력기관장 등 다른 인선이나 몇몇 정치적 법안과의 연계투쟁 운운 하고 나선다면 이는 자가당착이고 대단히 염치없는 일이다.

여야 불문하고 국회에 기대하는 예의는 예산 통과 과정에서 보여준 넘치는 힘을 앞으로 결산에서 더 가열차게 보여달라는 것이다. 속도가 필요한 현 상황으로 볼 때 재정 조기집행은 물론 추가확대도 불가피해 보이고, 이런 과정에서 새버리기 쉬운 재정지출에 대해 그 부담자인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는 끝까지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박태욱 경제담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