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프리뷰&리뷰>한석봉 - 한석봉체의 뿌리와 영향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석봉이 맨처음 글씨를 배운 스승은 지조있는 선비였던 영계(瀯溪) 신희남(愼喜男)이었다.그에게 배운 글씨는 조선초기 유행했던 송설체(松雪體).원나라 학자였던 조맹부(趙孟부)가 완성한 송설체는 고려말부터 전해졌다.조선초기 안평대군 이용이 그 진수를 체득하면서 조선전기의 대표적 글씨체가 됐다.

석봉이 태어난 때는 송설체의 유약함에 다소 식상해 있을 무렵이었다.석봉은 이런 분위기속에 서예로 일가를 이룰 결심아래 서성 왕희지를 스승삼아 공부를 했다.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는 왕희지 글씨는 여러번 새긴 목각판 법첩 뿐이어서 자연히 석봉식 왕희지 글씨가 나오게 됐다.조금 통통하면서 힘찬 해서 글씨는 여러번 판을 찍어내 획이 두툼해진 왕희지의'황정경(黃庭經)첩'에서 비롯한다는 지적이다.

석봉은 큰글자는 원나라 말기의 승려였던 설암(雪庵)글씨를 익혔다.승려 특유의 탈속한 맛이 있는 설암체는 석봉체속에 녹아들어 조선 후기 현판글씨의 전형을 이루게 된다.간송미술관 최완수연구실장도“설암체에 연유하는 석봉의 큰글자에 추사 현판글씨의 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석봉체 가운데 유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소론에게 이어지고,강건하고 힘찬 필치는 노론에 이어졌다는 말을 떠올리면 추사의 뿌리가 석봉에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왕실에서부터 선비사회는 물론 산사에까지 온통 석봉체였지만 석봉에게는 제자가 없다.미천한 가문 출신이란 이유로 문인사회로부터 때때로 배척받았던 때문이다.안평대군의 추종자가 일파를 이루고 추사의 맥통이 전해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전시에는 선조의 지시로 석봉체를 익힌 왕실의 글씨와,특히 한세대 뒤의 사람이지만 석봉체로 유명한 오준(吳竣)의 글씨가 범석봉파(汎石峯派)의 글씨로 소개될 예정이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설암체의 맛이 남아있는 석봉의 큰글씨 옥산서원 현판(경북안강 소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