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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문화>6. 렘브란트와 설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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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69)는 빛을 잘 활용한 독창적이고 감수성 높은 그림으로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그의 작품들은 도시 부르주아지의 생활사를 세밀히 묘사.전달해 역사매체로도 큰 평가를 받는다.

생활사의 단면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그의 자화상이다.한결같이 찡그린 표정이다.“깊은 생각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 관람자와 영적 대화를 한다”는 평도 있지만 실상은 엉뚱했다.그 시절 유럽에 막 소개된 설탕의 달콤함에 빠져 충치를 앓았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중상주의 시대로 무역을 통한 경제활동이 부의 원천을 이루던 시기였다.네델란드는 그 중심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전국에 설탕이 흔했다.덕분에 대부분의 사람이 설탕을 즐길 수 있었다.하지만 치과치료술은 커녕 칫솔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썩은 이의 통증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중세때만 해도 유럽인의 식사에 맛을 더해준 것은 식초와 향초가 고작이었다.신맛과 향기가 요리의 핵심이었다.꿀은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다량의 설탕 유입은 케이크와 과자.시럽을 이용한 전병등 단맛 나는 음식을 유행시켰다.일반인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한 중상주의는 음식문화의 변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수입품이라 설탕을 이용한 식품은 고급 음식의 대명사가 됐다.“백성들이 빵이 없다고 아우성”이라는 말에 프랑스의 루이 16세가“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일화는 당시 귀족과 서민의 음식문화 격차를 잘 반영하는 말이다.

이후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되면서 환금작물을 집중재배하는 농원,즉 플랜테이션이 발달하는데 사탕수수밭은 당연히 영순위에 올랐다.네덜란드는 남미의 가이아나에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고 1750년에는 네덜란드 전역에 이를 이용한 제당공장만 1백30여개가 서게 된다.영국도 이를 뒤따른다.

열대.아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사탕수수 대용품으로 온대지방에서도 자라는 사탕무가 있다.1747년 독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크그라프가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그전까지 사탕무는 가축사료에나 쓰였다.

사탕무가 흔해지면서 전통적인 맛난이인 식초에 담가 맛을 낸 다음 채썰어 샐러드로 먹는등 다양한 요리법이 개발됐다.지금도 구미 전역에서 새콤달콤한 사탕무(Beet Root)샐러드는 인기 식품의 자리에 올라있다.사탕무는 식초와 반응하면 짙은 보라색으로 변색하는데 요리 장식용으로도 훌륭하다.독일.체코.폴란드의 식탁에선 빼놓을 수 없는 준필수 식품이다. 채인택 기자

<사진설명>

렘브란트의 자화상.52세때인 1658년 작품.굳게 다문 입가의 긴장은 설탕이 만든 충치가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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