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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괜,찬,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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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로 온 여선생님이 칠판에 시를 써 내려간다. 하얀 목덜미. 소년은 그만 숨이 멎는다. 가슴이 탄다. 청춘의 고통이 짝사랑뿐일까. 친구를 잃고 세상에 베일 때마다 소년은 주문 외듯 시를 읊는다. 선생님이 가장 좋아한다던 그 시의 후렴구를 애써 되뇐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영화 ‘겨울나그네’를 만든 곽지균 감독의 2000년 작 ‘청춘’이다. 흥행 못한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꽤 많은 건 아무래도 그 시구 때문일 게다. 인터넷 포털엔 지금도 간혹 “그 시가 누구 작품이냐”는 질문이 뜬다. 미당 서정주가 1950년에 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다.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수부룩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까투리 메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이렇게 문 여는 시 속 세상은 충만하다. 내리는 눈발은 꼭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산도 산도 청산도 안기어 드는 소리’만 같다. 품속 만물을 토닥이며 눈은 속삭인다.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이를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 빠졌을 때 산전수전 다 겪은 집안 어른이 어깨 치며 찢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어조’라고 했다.

시인 천상병은 1988년 “간경화가 심해 일주일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다. 4개월 뒤 기적처럼 회생한 그는 산문집 한 권을 낸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는 고문·가난·병마로 뒤엉킨 자기 삶을 곧이곧대로 긍정했다. ‘경이로운 정직성’(작가 천승세)으로 종종 동료들의 갖은 고민을 무람하게 만들었다. 작가 김훈은 ‘별 볼일 없이 다 떨어진 삶이 이다지도 피곤할 수 있을까. …그런 막막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면 그를 찾았다. 그의 무량한 ‘괜차니즘(뭐든 괜찮다는 생각)’에 기대 편히 쉬었다.

요즘 서점가의 흥행 키워드는 ‘위로’다. 불황만큼 깊은 불안을 떨쳐내고 싶어서리라. 소설가 공지영의 대담집 『괜찮다 다 괜찮다』가 그중 선두다. 몇 년 전 나온 책도 다시 인기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홀어머니가 못내 안쓰러운 아이가 있다. 자식들에게 밝은 모습만 뵈려 애쓰는 엄마다. 저녁상을 봐온 엄마가 “반찬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자 아이가 말한다. “엄마, 힘들면 울어도 괜찮아요. 엄만 지금 우리를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으세요.” 중학교 교사 김상복씨가 제자들의 얘기를 엮은 책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의 한 토막이다. 일주일 뒤면 설이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끼리 이런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추워도 춥지 않고 안 먹어도 배부르리라.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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