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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총장…기대와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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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달 말 국내의 대표적 이공계 교육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회는 제12대 총장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 스탠퍼드대 로버트 로플린 교수를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대학이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언론에서도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처럼 한국 과학기술계의 도약을 기대한다는 등 대체로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한국 대학의 폐쇄성과 순혈주의(純血主意)는 세계적 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왔기 때문에 외국인 총장 영입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과학기술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기대와 함께 몇 가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우려의 목소리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서 탁월한 대학총장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다. 히딩크 감독의 선수 생활이 화려한 것은 아니었듯이 스타 플레이어와 우수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 쟁쟁한 노벨상 수상자가 즐비한 외국의 유명 대학에서도 총장을 선임하기 위해서는 총장선출위원회(search committee)를 구성해 몇 달 혹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후보자의 자질과 비전을 점검한다. 이번 KAIST 총장 선임은 국내 시간표에 쫓겨 한달 남짓한 사이에 결정됐는데 과연 이 기간에 최선의 후보자를 찾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는지, 후보자를 철저하게 검증하기에 충분했는지 궁금하다.

둘째, 국내 대학의 여러 여건이 외국인 총장이 자기 포부를 펼 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가 돼 있느냐는 점이다.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주위의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국내 대학들은 아직도 정부의 여러 간섭에 묶여 있고, 특히 이공계의 경우 선진 외국대학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투자로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다행히도 KAIST는 과학기술부 산하에 있어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일반 대학보다는 여건이 나은 편이지만 그렇더라도 과연 외국인 총장의 의욕을 충분히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 노파심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번 실험은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제 우리 국내 대학들도 양적 팽창을 지양하고 질적 도약을 시도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제 수준에 걸맞은 대학 조직의 뼈아픈 구조조정이 필수적이다. 아무래도 직선으로 선출되는 학내 인사들은 이러한 구조조정에 소극적이기 쉽기 때문에 국제적 안목을 가진 외부 인사 영입은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교육기관의 하나가 KAIST라는 점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이 실험이 꼭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의 외국인 총장 선임 과정은 KAIST 구성원은 거의 소외된 채 과학기술부 등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그러기에 이 실험을 성공시킬 1차적인 책임도 정부에 있다. 외국인 총장 영입은 시작일 뿐이라는 인식하에 새 총장이 포부를 펼 수 있도록 꾸준히 제반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KAIST는 1971년 설립된 이래 엄격한 학사 관리와 공정한 교수 인사제도 등을 통해 국내 이공계 대학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고, 지난 총장 선임 때는 교수들 자체로 외부 인사 영입을 추진했을 정도로 개혁적인 조직이다. 만의 하나라도 정부의 준비 소홀과 의지 부족으로 실험이 실패하고 그 책임을 대학 구성원에게 떠넘기는 일은 KAIST의 명예를 위해서나 한국 대학의 발전을 위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