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3. 한국판 슈바이처 신장곤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969년 38세의 나이로 한국정부의 의료진 해외파견 프로그램에 자원,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떠나 원주민들로부터'우아송고스'(생명의 은인)라 불리며 24년간 인술을 펼친'한국판 슈바이처'申壯坤(66)박사.申씨는 5년전인 93년 영구귀국,현재 경남진주시 진주성모병원 외과전문의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申씨는 귀국 직전 중앙아프리카 코링바 대통령으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고 적십자사 명예총재로 추대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생활에 깊숙이 젖어있던 저로서는 변화한 조국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심지어는 방송 뉴스를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도 생경했고,언제 어디서든'빨리 빨리'로 통하는 우리사회의 문화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렵더군요.아프리카의 여유로운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저는 말도 동작도 매우 느리거든요.'한국판 슈바이처'라는 명예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생계대책이었습니다.”'청진기 하나 가지고 갔다가 이름 석자만 달랑 들고 돌아온'申씨는 기거할 집조차 없어 친척집 문간방에 머무르다 진주성모병원장 李德燮씨의 주선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슈바이처 박사가 희생과 봉사로 평생을 바친 아프리카 땅 가봉이 申박사가 처음 도착한 곳이었다.당시 우리나라 사람은 단 한명도 살지 않았고,申박사는 그곳 수도 리브르빌국립병원 외과에서 계약기간인 2년동안 근무했다.

“아프리카는 참으로 아름다운 지역이에요. 조금 살다 보니 힘들다는 사실보다 그곳의 천연적인 자연과 때묻지 않은 원주민의 삶에 매료됐어요.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프리카에의 애정이 깊어진 申씨는 이후 계약을 연장,자이르에서 13년,중앙아프리카공화국 빔보시립병원장으로 9년을 근무했다.

“정년이 돼 귀국했어요.몇년만 더 있어달라는 원주민들의 청을 뿌리치기가 참 어려웠어요.한국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기후로 풍토병에도 걸려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기도 했지요.세 아이가 한꺼번에 말라리아에 걸려 위험했던 적도 있었어요.하지만 제게 치료받는 일 자체를 기쁨과 영광으로 여기는 원주민들은 제게 의사로서의 최대의 보람을 안겨주었지요.진료를 받은 원주민들이 계란.파파야.바나나등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해올 때면'이게 참의사의 길이로구나'하는 큰 뿌듯함이 일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슈바이처 박사와 일본인 의사 노구치 히데오를 존경하고 사숙해 오던 申씨에게는 아무래도 아프리카식 의료활동이 제격이었다는 이야기다.아프리카의 추억을 잊기 어려운 申씨는'기력이 남아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인술을 펼쳐보겠다'는 생각이다.

申씨는 건강을 위해 틈이 나는대로 운동을 하고 휴일이면 평생 반려 宋必連(61)씨와 함께 인근 휴양지를 찾으며 천생 의사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 진주=고규홍 기자

<사진설명>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진료할 당시의 '한국판 슈바이처'申壯坤 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