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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철거 맞서던 달동네 문화를 만나 예술촌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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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 열네 살 묵어(돼) 여기 동피랑 올라왔다. 철거되면 우짜노(어떻게 하나) 싶어 잠이 안 왔는데…. 그대로 살아도 된다 카이(하니) 얼매나 좋노.”

15일 경남 통영시 강구안 항이 한눈에 보이는 동피랑 마을. 이양순(72) 할머니가 벽에 그려진 장미를 가리키며 “알록달록하이(하니) 보기 안 좋나”라고 자랑했다.

2007년 과 2008년 두 차례의 벽화 작업을 통해 달동네 이미지를 벗은 경남 통영시 동피랑 마을의 모습. [통영=송봉근 기자]


동피랑 마을은 통영시 태평동과 동호동 경계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대표적 달동네다. 슬레이트와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크기 50∼100㎡ 규모의 판잣집 53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폭 1~2m의 비좁고 꾸불꾸불한 골목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다. 화장실은 아직도 ‘푸세식’이다.

통영시는 최근 이 마을을 헐지 않고 문학과 예술을 접목시켜 리모델링하는 ‘동피랑의 재발견’ 사업을 확정했다. 12억원을 들여 이주를 바라는 14채를 사들여 이 중 9채를 소설가·시인·화가 등 예술인들에게 매달 10만∼15만원을 받고 임대하는 것이다. 헐고 번듯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기존 집을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조금씩 고치는 수준이다.

마을 위쪽 세 채는 헐어 충무공 이순신이 설치한 군영인 통제영(統制營)의 누각 ‘동포루(東砲樓)’를 복원하고, 두 채는 매점과 전시장으로 꾸민다. 주민들이 매점을 공동 운영하고, 전시장에선 입주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토록 할 예정이다. 이주를 원치 않는 나머지 집들은 그대로 살도록 했다.

입주 신청을 한 옻칠 공예가 김정좌(46·여)씨는 “분위기도 좋고 아름다운 항구가 보이는 곳에 작업실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공공미술과 골목문화의 만남=동피랑 마을은 한때 사라질 위기에 몰렸었다. 통영시는 2006년 초 판잣집을 밀어 버리고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2007년 10월 ‘푸른통영21 추진위’라는 시민단체가 마을 철거를 막기 위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골목문화를 보존하자”며 1차 벽화 공모전을 벌였다. 상금 3000만원도 내걸었다.

각지에서 달려온 젊은 화가 19팀 36명이 일주일 동안 19채의 집과 골목 담벼락마다 벽화를 그렸다. 화가인 진의장 통영시장도 참가했다. 마을 할머니들은 “어째 저리 곱그로(곱게) 칠을 했다노”라며 반겼다. 이후 ‘한국의 몽마르트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평일에는 20∼30명, 주말에는 200∼300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동피랑이 관광객을 끌어들이자 통영시는 지난해 7월 철거 계획을 철회했고, 2차 벽화 작업이 이어져 7채의 집이 새롭게 단장됐다. 서울에서 온 박희은(22·여·대학생)씨는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달동네를 없애지 않고 아름답게 가꿔 놓은 의미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상을 기대하며 이주를 바라는 주민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이들은 “벽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즐거울지 몰라도 낡은 집에 계속 살아야 하는 건 고통”이라며 마을 보존을 반대했다.

◆도시 재생의 모델=보존과 철거로 갈라진 주민들 사이에서 고심하던 통영시는 이주를 희망하는 주택은 매입하고,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은 그대로 살도록 하는 ‘윈-윈’ 방안을 제시했다. 통영시 건축디자인과 조철규(43) 담당은 “오갈 데 없는 연세 많은 어르신들을 쫓아내 가면서까지 공원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며 “예술촌으로 확대할지는 이주할 주민들이 더 나오면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동피랑 마을에선 희망하는 집에만 벽화를 그려준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은 푸른통영21과 마을 주민, 통영시가 참여하는 동피랑 주거환경개선위원회(위원장 최병대 경상대 교수)에서 결정한다. 푸른통영21 윤미숙(47)사무국장은 “2년마다 벽화를 다시 그리는 마을 축제를 열고, 주민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매점을 운영해 수익을 창출하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경상대 김영(도시공학과) 교수는 “동피랑 마을은 낡은 마을에 문학과 예술을 접목시켜 도시 재생을 성공시킨 대표적 사례”라며 “신도시 개발보다 기존 도시의 특징을 살려 재활용하는 도시 계획도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통영=김상진 기자 , 사진=송봉근 기자

◆동피랑 마을=동피랑은 ‘동쪽의 벼랑’이란 뜻의 통영 지역 사투리. 강구안 항 동쪽 벼랑에 있다. 2007년 10월 벽화가 그려진 뒤 아름다운 풍경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광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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