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읽기>만화방, 동심의 주인공 땡이.최고봉은 사라지고 일본만화 판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희미한 전등빛.등받이없는 긴 나무걸상.구석에서 떡볶이 볶는 냄새.불량과자.침을 잘못 묻혀 넘기면 어김없이 찢어지는 책장.주인 몰래 한권이라도 더 보려는 코흘리개들과 그것을 감시하는 주인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은근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던 곳. 7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만화가게를 연상할때 떠오르는 단상들이다.국민학교 앞이면 어김없이 한두곳이 있었고 고객의 대부분은 어린이들.나이든 세대랬자 흡연장소가 필요했던 몇몇 불량 중고생들이 고작이었다.

그 시절,놀 것없고 볼 것없던 아이들의 유일한 문화행위는 바로 만화를 보는 것이었다.김기백'장이의 대성공''인생마라톤',경인'용가리 시리즈''임창땡이 내가 최고',엄희자'고려청자',강철수'돌돌이와 멍멍이',김영하'최고봉 시리즈'등 70년대초까지 만화가게의 소프트웨어는 국내작가들의 순정.공상과학(SF).명랑물이었다.

그후 30년이 지난 오늘,70년대식의 만화가게는 더이상 없다.90년대의 만화가게는 초등학교 앞을 떠나 대학가.오피스타운에서 성업중이다.넓은 매장,꽉찬 서가,커피와 음료수,멀티비전으로 치장한 영업장은 70년대의 침침한 '하꼬방'과는 크게 다르다.고객의 대부분은 청춘남녀고 30~40대 중년층도 30%가 넘는다.

환상.자유.낭만의 공간을 버려두고 코흘리개들은 어디로 갔을까.우선은 만화에 빠져들 여유가 없다.95년이후 개정 학교보건법에 따라 초등학교 반경 2백안에선 만화대여업이 전면금지돼 아이들 가까운 곳에서 만화가게를 찾기는 어렵게 됐다.

게다가 만화방의 소프트웨어가 바뀌어 아이들이 읽을 만화도 없다.

'미스터 초밥왕''보스의 아들''요괴전사''빛과 그림자''크라잉 프리맨''짱구는 못말려'….지금 만화방엔 무단복제한 일본만화가 넘쳐난다.국내작가의 작품이라곤 이재학화실.천체황.하승남.황성.야설록 프로등에서 쏟아내는 무협만화가 99%고 대본소용 성인 저질만화가 올들어 새로 쏟아지고 있다.코흘리개들에겐 이해 안되는 내용.장면으로 가득한 만화만이 서가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중반 강철수'사랑의 낙서',고우영'일지매'등 가판용 국내 성인만화가 나오면서 대본소용 만화는 한차례 전기를 맞았다.그리고 80년대 초반 이현세의'공포의 외인구단'등장으로 한국만화는 중흥기.대학생층을 만화가게로 끌어들였다.

그 직후인 80년대 중반 일본 성인만화가 무단복제돼 쏟아져 나왔다.'인간흉기''도시의 사냥꾼''자유인'등으로 번역된 이 일본 성인만화는 누가 더 벗기나 경쟁하듯 적나라한 성애장면으로 가득했고 이는 대본소에 성인들을 끌어들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1년만에 사회문제로 비화돼 업주와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면서 만화가게에서 자취를 감췄다.그러나 이미 한국독자들에게 일본만화의 맛을 톡톡히 들여놓은 뒤였다.

90년대 들어 일본만화는 본격 재상륙했다.'드래곤 볼'이 대표주자였다.끝없는 환상과 기발한 아이디어,힘과 정의를 주제로 한 이 SF물은 적나라한 성인만화가 아니라도 일본만화는 성공한다는 '신화'를 이뤄냈다.

견디다 못해 국내작가들마저 만화가게를 떠났다.이현세.허영만.강철수등 80년대초 국내 만화의 중흥을 이뤄냈던 작가들은 90년대 들어 단행본.신문.잡지에만 그림을 그렸다.

결국 이 시대 만화방은 어둡고 칙칙한 공간으로 버려져 있다.30대후반 만화 매니어 김희석씨의 말까지 옮기고 나면 실지(失地)회복은 쉽지않아 보인다.“무협만화와 일본만화는 통쾌하다.거기엔 현실을 잊게하는 황당함과,성애와 관련한 말초적 자극이 있다.어려선 만화를 보며 낭만과 상상력을 키웠지만 지금은 재미와 자극을 얻는다.” 이정재 기자

<사진설명>

만화가게가 그립다.그 코흘리개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이승은의'엄마

어렸을 적엔'중의'만화가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