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정치권이 뭐라든 'NO' 일본 소신 경영인 늘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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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 3월말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총리와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관방장관이 심야에 재계 주요 인물들의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엔고불황때 함께 고생한 근로자와 협력업체들을 잊지 말아달라.”춘투(春鬪)를 앞두고 엔저로 생긴 과실을 적절히 배분하라는 정치적 주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은 노(NO).도요타는 부품가격을 2%씩 인상하고 기본급 9천4백엔을 인상하는데 그쳤다.혼다와 소니는 더짰다.다음의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일본 재계가 정치권의 요구에 정면으로 반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이처럼“노”라고 말할수 있는 일본 톱 경영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도요타자동차의 오쿠다 히로시(奧田碩.65)사장과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60)사장,브리지스톤 타이어의 가이사키 요이치로(海崎洋一郎.64)사장등…. 전문경영인 출신인 이들은 창립자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지만 2000년 이후까지 장기집권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아지고 있다.강력한 리더십을 갖춘데다 회사의 실적도 사상최고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풍부한 해외경험에다 기술에 정통하다는 것.또 최대의 라이벌인 미국기업의 강점과 한계도 잘 알고 있다.

히토쓰바시(一橋)대 출신인 오쿠다사장은 대학때 유도챔피언을 지냈다.올해초 그는“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영국에 한푼도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영국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그는 사과나 변명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뚝심을 발휘했다.소니의 이데이 사장은 17명의 선배를 제치고 사장에 발탁됐던 인물.오가 노리오(大賀典雄)회장은“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소니는 없었을 ”이라고 자랑하고 있다.영업.기술 양쪽에 모두 해박해 리튬이온 전지를 개발하고 영화사업을 흑자로 반전시키는등 올해 소니에 사상 최대의 흑자를 안겨주었다.

브리지스톤의 가이사키 사장은 전형적인 국제통.그는 다른 회사들이 감량경영을 위해 임원수를 줄일 때 임원수를 대폭 늘렸다.중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감량경영은 감량경영일뿐,해외현지에서 책임지고 결정을 내릴 임원이 필요하다”며 밀어붙인 것이다.교세라그룹의 이나모리 가쓰오(稻盛和夫)회장과 손마사요시(孫正義)소프트방크사장은 새로운 오너경영자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일본 벤처산업의 대부격인 이나모리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떠나 수도승이 되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았는가 하면,39세의 孫사장은 후손들에게 일체의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등 젊은 나이에 이미 경영권과 유산의 사회적 환원을 밝혀놓은 상태다.

불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호황기를 이끌고 있는 일본의 새롭고 독특한 톱 경영자들.요즘 일본국민들은 정치인들보다 이들에게서 미래의 희망을 찾고 있다. 도쿄=이철호 특파원

<사진설명>

오쿠다 히로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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