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의명과암>下. 한국은 무엇을 본받아야 하나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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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디오 테이프를 일본에 수출하는 ㈜SKM 일본사무소의 윤병용(尹炳勇)소장은 요즘 한숨이 늘었다.“달러당 1백엔에서 1백10엔 사이만 돼도 버텨 보겠는데 1백27엔대를 들락거리는 지금 상황에선 도저히 가격이 맞지 않는다.” ㈜대우의 일본 현지법인 대우재팬에서 섬유.경공업제품을 담당하는 김낙주(金洛柱)이사는“최근의 엔약세로 일본제품과 대등하게 맞서던 아이템들의 가격경쟁력이 10~20%나 떨어졌다”고 말했다.

한국무역협회 도쿄(東京)지부가 일본에 진출한 한국무역업체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대일(對日)수출에서 채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바람직한'환율은 달러당 평균 1백2.9엔으로 나타났다.1백25엔 안팎의 요즘 한숨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환율사정이 호전되면 한국의 대일수출은 안정적으로 늘어날까.일본주재 한국상사맨들은 “엔고(高)는 물론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이구동성으로“일시적 효과는 크겠지만 장기적.근본적으론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극단적으로 말해'한국에서 들여와 팔아 먹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김두환(金斗煥)도쿄무역관장은 엔화 환율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한국의 업계를'공부안한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성적이 내려갔다고 변명하는 수험생'에 비유했다.한국 경제계가'기본기'를 강화하지 않는한 대일수출 사정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호전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일본에 진출한 미국기업들과 일본 국내기업들의 모임인 미.일경제협의회는 지난달 1백20개 미국계 회사의 대표들을 상대로 일본내에서 성공 요인을 조사.분석한 보고서를 냈다.이들이 첫째 요건으로 꼽은 것은'차별화'.첨단기술이든,제품이 혁신적이든,가격이 파격적이든간에 다른 물건과는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는 일본시장의 어려운 점으로 각종 규제와 높은 코스트,일본의 독특한 상거래 관행을 꼽고 있다.도쿄의 한국계 기업들도 절감하는 어려움이다.그러나 일본의 폐쇄적인 시장구조를 탓하기 전에 그들의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지난 3월 삼성전자가 아키하바라(秋葉原) 전자상가에 본격진출하는데 한몫한 삼성그룹 일본 본사의 박재욱(朴在旭)전자영업본부장은 '포화(飽和)시장은 없다'는 일본제조업계의 집요한 상혼(商魂)에 주목한다.“일본제조업은 공장 중심이 아니라 시장 중심으로 움직인다.고객의 요구에 신속히 반응해 새 시장을 창출하는 경영이 체질화돼 있으니 세계시장에서도 강할 수밖에 없다.” 朴본부장은 포화상태로 인식되던 일본의 전자제품 시장을 예로 들었다.3년전 히로시마(廣島)의 한 판매점에서'손으로 잡지 않고도 통화할 수 있는 무선전화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고객의 요구를 접한 메이커(산요)는 이를 재빨리 수용,신제품'데부라 전화기'를 내놓아 대히트를 기록했다.현재 냉장고시장을 휩쓸고 있는 양방향 개폐 냉장고도'냉장고 문을 오른쪽.왼쪽에서 모두 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다.

일본 수출업계가 최근 만끽하고 있는 엔저(低)효과도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얻어진 것이다.그러나 금융.건설등 경쟁없는 국내영업에 안주해온 산업들은 개방이란 격랑에 어쩔 수 없이 내몰리자 심각한 홍역을 치르고 있다.이제 선진국으로 분류되고 시장개방이란 대세를 거스를 수도 없는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진정한 힘은 경쟁을 통해서만 길러진다는 것,경쟁은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는 것,경쟁을 피하려 해선 결국 도태되고 말 뿐이라는 냉엄한 현실.이런 교훈을 깨치지 못하면 결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도쿄=노재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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