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을찾아서>김형영 시집 '새벽달처럼'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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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어떤 언어 조립의 기술도 거부할 때 시인의 감동할 줄 아는 가슴은 열리고,그 가슴으로 감동한 것을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똑같이 감동할 수 있게 하는 시를 쓸 수 있다고 봅니다.시가'직정언어(直情言語)'로 쓰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오늘의 시인도 지켜야만 하는 마땅하고 당연한 화두라 생각합니다.” 중진시인 김형영(金炯榮.53)씨가 다섯번째 시집'새벽달처럼'을 펴냈다(문학과지성사 刊).66년'문학춘추'로 등단하고 현대문학상.한국시협상등 유수문학상도 탄 金씨에게 등단 31년간 5권의 시집은 상당한 과작(寡作)인 셈.1,2년이면 쉽게 시집 한권씩을 펴내는 현 시단에서도 金씨는 언어의 조립이 아니라 감동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직정언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가슴 속 감동이 메말라 보일 때면/어린 날의 그 벌고 벗고 즐거웠던 일들을/기억의 다락방에서 꺼내어/그걸 사진 찍어/가슴 속에 걸어두었다가/가끔씩은 꺼내 보라고/낄낄낄 웃으며 꺼내 보라고//그러면 어느새 좋은 생각들이/봄날 들판에 풀잎 돋아나듯/가슴 디밀며 디밀며 솟아난다고/당신 생각의 샘물을 길어주셨는데.”“기막힌 기막힌 시들만 써라”고 가르쳤던 원로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씨에게 쓴 시'화창하신 웃음'한 부분이다.벌거벗은 기억과 언어로 막힘 없는 시를 쓰라는 그 가르침은 金씨의 시들을 자연스레 압축과 마침내는 소멸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아직도 편안한가/그대 내 숨이여/이젠 아주 말뚝이 되어/쉬시라//그대 곁에 가서/그대 숨소리 들으며/그대 지붕아래/편안히 잠들 때까지//그대 내 숨이여”-. 고향 부안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시'부안'전문이다.고향에 어떠한 수식적,해서 인위적이 될 수밖에 없는 형체도 주지않고 그대로 '내 숨'이라며 고향과 일체가 되어버린다.꽃.바람등 자연의 순리에 맡긴 그 고향,내 안의 숨소리는 지극히 편안하다.이 숨소리는 또다른 시'숨에게'에서'날새듯 피어오르는 땅의 숨소리'며'햇살 눈 비비고 움트는 초록'의 소리로 나타난다.생명의 율동감이 우주적으로 확산되는 소리를 편안하게,자연스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눈덮인 산중/늙은 감나무/지는 노을 움켜서/허공에 내어건/홍시 하나,//쭈그렁 밤탱이가 되어/이제 더는/매달릴 힘조차 없어/눈송이 하나에도/흔들리고 있는/홍시 하나,//하늘과 땅 사이에/외롭게 매달린 예수처럼/바람으로 바람견디며/추위로 추위견디며/먼 세상 꿈꾸고 있네”-. 겨울 노을지는 창공을 배경으로 허허로이 매달려 있는 홍시를 소재로 한'하늘과 땅 사이에'전문이다.홍시는 눈송이 하나에도 흔들리며 예민하게 하늘과 땅의 의미를 응축하고 다시'먼 세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비록 쭈그렁 밤탱이가 되었지만 구세주 예수처럼 예지자.예언자로서의 홍시가 우주와 교신하고 있다.이 홍시는 시인.시 자체의 상징이기도 하다.金시인의 절제된 언어와 이미지들이 감동을,사물의 의미를 곧이 곧대로 전하는'직정언어의 시'들을 어렵게,어렵게 낳고있다.

이러한 金씨의 시들이 전하는 감동을 문학평론가 김현은 일찍이'수정의 메아리'라고 평한바 있다.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김형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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