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세로읽기>예술창작의 자유와 규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요즘 온나라가 경제 살리기에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다.회생의 처방으로 갖가지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제1번으로 꼽히는 항목이 으레 정부의 각종 규제 철폐다.정부가 틀어쥐고 있지만 않았어도 경제가 이 꼴은 안됐을 거라는 얘기다.글쎄,맞는 논리겠지만 똑같은 논리가 문화예술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 것같다.

경제논리대로라면 문화예술은 진작 눈부시게 발전했어야 옳다.왜냐하면 내가 아는 한 문화예술 분야에는 거의 무정부 상태라 할 만큼 아무런 법적.제도적 규제의 틀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따지자면 규제장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요즘 언론에 보도된'학교보건법'같은 것이 그 예다.학교로부터 직선거리 1백 내에서는 극장 영업을 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학교부근에서는 순수 연극공연도 못한다고 해서 어느 공연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법률조항도 학교부근에서 연극을 못하게 하기 위한 행정당국의 강력한 의지의 발동은 아니다.극장구경이란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것이라는 구시대적 통념에 의해 만들어진 법규를 아무 생각없이 유지해왔을 뿐 극장이란 용어안에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는 순수연극이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규제는 곧 관심이다.문화예술쪽에 규제가 없다는 얘기는 곧 문화예술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무관심의 징표다.

지난 88년이래 정부는 자유화의 촉진이라는 미명아래 생색내듯 문화예술쪽에 갖가지 규제철폐의 선심을 써왔다.소위'공연윤리위원회'의 연극대본 사전심의 철폐가 그 대표적 예다.그리고 내친 김에 공연단체 등록절차마저 신고제로 풀어주고 말았다.자유화에 따른 아무 후속보완조치도 없이 말이다.그래서 결국 혜택을 누린 것은'양아치'집단들의 저질 외설연극 뿐이다.

근래에는 사법부까지 나서 영화 사전검열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렸다.이 때문에 지금 영화계는 심각한 진통을 앓고 있다.나는 연극.영화의 사전심의제도를 지지하는 주장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다만 예술창작행위란 것도 결코 치외법권적.무제한적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정부가 정작 해야 할 일은 무책임한 규제철폐의 남발이 아니라 문화예술에 대한 보호.육성이다.

영국정부는 지난 60년대초 배우학원들이 난립하자'국가연기교육위원회'를 구성해 매년 신설 배우학원들의 자격을 심사해 합격한 학원들에만 설립허가를 내주면서 교육예산의 지원혜택까지 베풀었다.곧 규제와 보호,양날의 칼을 빼든 것이다.그 결과 영국의 배우학원들은 세계 최고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우리 정부당국자들이 들으면 무슨 잠꼬대냐고 코웃음칠 것이다.정부가 할 일이 없어서 그까짓 사설 배우학원들까지 육성해야 하느냐고. 규제철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급속히 변화하는 시대추세를 주시하면서 발빠르게 대응해 보호.육성책을 펴는 것만이 우리 문화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정진수 성대교수.연극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