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笑劇으로 끝나선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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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다.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은 진솔한 사죄와 참회다.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교훈이다.한보(韓寶)사태와 청문회를 통해 국민은 적어도 이 세가지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진실은 커녕 오히려 빤한 거짓말과 변명이 쏟아지는 가운데 의혹과 분노.실망만이 쌓이고 있다.

간혹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용기있는 참회나 눈물의 사죄도 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러니 무슨 역사적 교훈을 기대하겠는가.이제는 그나마 검찰의 양식을 믿어 볼 수밖에 없다.

분노.의혹만 쌓인 청문회 평생동안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 왔던 사람으로서 여야 정치인들에게 권세와 명리(名利)를 멀리 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그러나 가까이 하더라도 물들지 않아야 함은 그들의 필수적 덕목이다.그런데 한 재벌의 검은 돈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이 어찌 그토록 많을 수 있었는지….정치자금이다,떡값이다 하는 말로 오명(汚名)을 벗어보려는 그들의 안간힘은 또 얼마나 궁색해 보였던지….그쯤에서 솔직히 사과하고 깨끗이 사퇴하는 사람이 단 한명만 있었어도 이렇게 허탈하고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같다.

당사자는 물론 주위나 언론에선 정치풍토나 관행을 문제삼는 듯하다.그렇다.정경유착이나 떡값은 분명 관행이 돼 왔고 결국은 풍토화됐다.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이 나라를 이끌고 가는 지도층이 아니던가.좋은 관행과 풍토를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아니던가. 한 나라를 세우는데는 수십,수백년의 세월이 필요하지만 허무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한다.일국의 지도층이 나라를 세우는 일보다 허무는 일에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니 이 무슨 해괴한 변설(辯舌)이란 말인가.국민에게 소환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역사를 바로세우겠다는 대통령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영아(영兒)의 병은

배부른데서 오고 권신의 화(禍)는 총애에서 온다고 했다.기껏 가신의 머리를

빌리고 어린 아들의 총기를 대견해 했다니 어찌 그들에게 화가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절대권력을 쥔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 권세와 명리에

물들지 않고 권모와 술수에 의연하기를 바랐다면 대통령의 처세는 처음부터

오늘의 비극을 준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대통령이 혹시 지금도 그들의

변명을 수긍하는 편에 서있다면 첫 단추만이 아니라 마지막 단추까지 잘못

끼우는 결과가 될 것이다.그건 크나큰 비극이다.

지금 항간엔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오죽

참담했으면 고국을 등지고 싶다 하겠는가.이것은 도피의 말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항변이다.어떤 비극적인 사건에서 우리가 국가적이나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교훈을 얻지 못할 것 같으면 그런 사회는 희망을 잃은

사회다.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뭔가.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아무도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고 있다.그리고 그런 현실을 개탄해 낡은 풍토를

혁파(革罷)하기로 다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청문회가 갈수록

소극(笑劇)이 돼가는데도 한편에선 대권주자들의 발소리만 시끄럽다.그들을

뒤쫓는 언론도 문제의 본질보다 겉모습에 집착하고 있다.가령 정치풍토의

혁파없이 이대로 대선을 치를 경우 그 뻔한 뒤끝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제도개혁의 계기 삼아야 작금의 대권 레이스가 고작'용의 눈물'에 비유될

그런 한가한 구경거리가 아니지 않은가.적어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정치풍토라면 제도개혁과 아울러 민족의 장래를 맡겨도 될 능력의 검증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런데 이 꼴 저 꼴 다 그렇지 못하니 아예 떠나고

싶다는 말을 토해낼밖에.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다.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시간에 국가적 정력을 뜻하지 않은 일에 쏟아 부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현사태를 복원의 전기로 삼는다면 그건 낭비가 아니다.따라서

한보사태와 청문회는 국력을 수렴하고 국민의 마음을 결집하는 회향(回向)의

계기가 돼야 한다.반대로 한때의 통과의례가 되고 만다면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고흥문〈前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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