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데올로기 벗고 ‘다름’을 포용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5호 01면

올해는 링컨과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두 사람이 1809년 2월 12일, 같은 날 태어난 것은 여간 공교롭지 않다. 링컨은 미국 켄터키주에서, 다윈은 영국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미국발 경제위기의 쓰나미가 온 지구를 덮치고 있는 이때, 우리의 마음이 이 두 사람으로 향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년 전 같은 날 태어난 링컨·다윈이 새해에 던지는 화두

오바마는 링컨 대통령이 취임식 때 쓴 성경을 연방 의회도서관에서 빌려 냈다. 링컨처럼 그 성경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기 위해서다. 95%의 흑인 표를 얻은 아프리카계 오바마가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을 추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링컨과 동일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종과 당파를 넘어 국민융합을 가능케 하는 꿈을 링컨에게서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이 노예요, 반이 자유인으로 구성된 국가는 영원히 존속될 수 없다”는 신념 아래 목숨을 건 링컨의 통합 정치는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다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오늘날 영국 국교회는 성명을 발표했다. 맬컴 브라운 목사는 “당신을 오해한 최초의 교회 반응에 잘못이 있었음을 사죄한다”는 것이었다. 신학 분야만의 일은 아니다. 약육강식 등 150년 동안 다윈에 얽힌 곡해와 악용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늘날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구조개혁을 할 때마다 방패로 삼는 것도 다윈의 이론이다. “이 세상에 살아남는 생물은 가장 힘이 센 것도, 가장 지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적응을 잘하는 생물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이 출처불명의 말이 다윈의 꼬리표를 달고 수상 연설문이나 기업광고의 카피로 이용되고 있는 일본의 예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놀랍게도 다윈 자신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evolution)란 말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 “진화는 진보가 아니며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어느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더 고등하다는 생각은 합리적이 아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가 평소 노예제도에 반대 의견을 보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링컨과 다윈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 평등성이다. 그것을 정치사상으로 보여 준 것이 링컨이며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관찰한 것이 다윈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생물 개체의 다양성과 그 ‘다름’을 인정하고 보존해 가는 탈이데올로기의 통합정신이다. 실제로 그들은 나와 다른 사람의 하찮은 의견에 귀 기울여 중요한 것을 얻었다.

링컨이 선거로 고전하고 있을 때 그레이스라는 한 소녀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턱수염을 길렀다. 얼굴 이미지가 달라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턱수염은 링컨 민주주의의 브랜드로 굳어졌다. 다윈 역시 그랬다. 예사로운 총독의 말 한마디에서 그는 갈라파고스 123개의 섬에 사는 거북이들이 섬에 따라 모두 다른 차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다름의 발견이야말로 우월과 차별이 아닌 생물 진화 현상의 기본 틀을 만든 전기(轉機)가 된 것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콧수염이 다윈의 자연선택 진화론을 왜곡·악용한 것이라면, 링컨의 턱수염은 다윈의 생물 다양성을 선점하여 노예해방을 선언한 상징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백 년, 이백 년을 지나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 과제로 넘겨졌다.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겪게 될 이념갈등과 경제불황의 쓰나미를 풀기 위해 우리 역시 오바마처럼 링컨을 모델로 하여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 내야 한다. 그리고 브라운 목사의 사죄처럼 우리도 다윈에게 품었던 많은 오해를 씻고 탈이념화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말로 ‘같잖다’는 말을 써 왔다. 그것은 ‘같지 않다’의 준말로서 나와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뜻을 품고 있다. 삼족을 멸하는 극한적 정쟁, 획일적 교육과 문화, 그리고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일률적 산업주의 경제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링컨과 다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