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숭배 이야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5호 09면

1 전용환 작 ‘Transforming Cycles - 소’, 알루미늄+도장, 60×30×40cm, 2008,2 이재효 작 ‘0121-1110=101093’, 나무, 28×11×20cm, 20013 이길래 작 ‘牛松’, 동파이프+산소용접, 80×96×8cm, 2008 4 박선영 작 ‘행복한 음메’, 종이+크리스털, 73×60cm, 2008,5 성동훈 작 ‘무식한 소’, 시멘트+철, 180×180×200cm, 1994 6 최태훈 작 ‘skin of bull’, 스테인리스 스틸, 78×28×44cm

고대 이집트에는 신성한 소를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마에 흰 삼각형 무늬가 있고 꼬리 끝이 갈라진 검은 수소를 뽑아서는 ‘아피스(Apis)’라고 부르며 기술과 창조의 신 ‘프타(Ptah)’의 화신으로 여겼다. 아피스로 뽑힌 소는 널따란 운동장이 딸린 신전에서 공물을 잔뜩 먹으며 호강하다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져 지하묘지에 매장됐다.

7 박민섭 작 ‘아버지’, FRP, 20×30×55cm

한 아피스가 죽으면 애도 기간을 거친 다음 새로운 소를 찾아 아피스로 정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인이 이곳에서 잠시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는데, 그 우상 역시 황금 송아지였다.

예부터 노동과 고기와 젖을 제공해 온 소중한 가축인 소는 목축과 농경을 하는 고대인에게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인도의 힌두교 신자에겐 암소 숭배 풍습이 남아 있고 축제일이 되면 화환을 목에 건 암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와 비슷한 소 숭배(?) 모습을 21세기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새해 증시 개장에도 어김없이 진짜 황소가 나와 금융위원장의 화환을 받아 뿔에 걸었다. 첨단 금융의 중심지에서 열린 이런 고대 소 숭배 분위기의 행사는 묘한 느낌을 준다. 주식시장 오름세가 계속되면 불 마켓(Bull Market)이라 하고, 내림세가 계속되면 베어 마켓(Bear Market)이라 하기 때문에 주식시장의 호황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이라 한다.

베어 마켓은 18세기 영국의 곰 가죽 중개상들이 가죽 값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투기를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 개념의 불 마켓은 당시 곰과 소를 싸움 붙이는 것이 유행하면서 생겼다고 하지만, 어쩌면 풍요의 상징으로 소를 숭배하던 고대 전통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나 증시 호황을 바라는 마음은 같기에 뉴욕 월스트리트에도, 여의도 증권거래소 로비에도 황소상이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금융위기 와중에서 이 황소상들은 처연해 보일 지경이다. 소띠 해에 증시의 황소도 힘을 찾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언제나 황소만 바라보는 것이 지금의 위기에 일조한 것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대개 버블이 있었고, 버블은 지속적 상승에 대한 맹목적인 집단적 믿음에서 부풀어 올랐다. 그런 면에서 황소만 있는 거래소들이나 황소가 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여의도 거래소보다 황소와 곰이 공존하며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거래소의 조각(아래 사진)이 한층 의미하는 바가 클지도
모른다.


‘황소걸음展’
황소처럼 묵묵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며 자신의 작업세계를 착실하게 다져가는 개성 있는 조각가 9명의 전시회.
2009년 1월 7일부터 17일까지 서울 경운동 장은선 갤러리.
문의 02-730-3533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