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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울 전투기 2대 초계비행 - 황장엽 중국.필리핀.서울行 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20일 오전10시쯤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황장엽(黃長燁)씨가 특별기로 필리핀을 출발한뒤 서울공항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비행기 유도대원들이 트랩차를 몰고 계류장에 나타났고 경호원들이 분주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같은 시간 한반도 상공에는 숨가쁜 영공 방어망이 펼쳐졌다.오산의 공군 중앙방공통제소(MCRC) 요원들은 이상물체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수도권 육군의 경계도 강화됐다.

오전10시40분쯤.黃씨를 태운 특별기가 제주도 남방 항공식별구역내에 들어오면서 공군의 F-16 전투기 2대가 초계비행에 나섰다.비행이 시작된지 1시간여.특별기가 서울공항에 근접하자 전투기 2대는 상공을 선회한뒤 모습을 감췄다.

오전11시40분.안착한 특별기에 트랩차가 바짝 붙자 黃씨와 김덕홍(金德弘)씨가 나란히 모습을 나타냈다.67일간에 걸친 망명극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망명 전후=2월12일 오전10시5분.아직도 영하를 오락가락하는 차디찬 날씨에 베이징(北京) 특유의 건조함까지 겹쳐 행인들의 발길이 뜸하던 베이징 외교단지 산리툰(三里屯)에 위치한 한국총영사관 앞.

갑자기 털털거리는 택시 한대가 정적을 깨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여기가 한국영사관이 맞습니까.나 황장엽입니다.”

50대 초로의 비서를 대동한 노신사는 조용히 한국영사관의 문을 두드렸다.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주체 이데올로그의 망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국 체류=“한국에 못가게 되면 여기서 죽을 것입니다.”

1시간에 걸친 면담끝에 黃씨의 결연한 망명의지를 확인한 정종욱(鄭鍾旭)주중대사는 곧 한국과 중국정부에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한국에선 권오기(權五琦)통일부총리 주재로 긴급 통일안보조정회의가 열렸고 국방부는 북한의 국지도발을 우려,전

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중국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50여명의 경비병력을 파견,한국총영사관으로 향하는 4개 길목을 모두 통제하는등 경비를 강화했다.

2월17일.黃씨는 74회 생일을 맞았으나“북에 두고온 가족이 고통받고 있다”며 생일 파티를 거절하는등 가족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이때 김덕홍씨가 나서“대의를 위해 나온 사람들이 가족문제로 실의에 빠지면 되겠느냐”“모든

것을 잊고 통일의 대업에 온몸을 바치자”며 위로했다.

3월초.마침내 黃씨 망명문제의 가닥이 잡혔다.갖가지 안(案)중 필리핀 체류→한국행이 한.중간에 합의됐다.

중국은 당초 북한측을 고려,黃씨가 6개월~1년간 제3국에 머무르는 방안을 제시해 우리 당국자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끈질긴 외교노력끝에 3국체류일정을 한달로 잡기로 중국측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필리핀 체류=망명신청 33일만인 3월17일 밤.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필리핀 공수작전이 전개됐다.중국당국은 黃씨를 한국영사관에서 극비리에 빼내 베이징 인근 공군기지로 옮겼다.

공군기지에서 하룻밤을 묵은 黃씨는 18일 오전 군용기로 푸젠(福建)성 샤먼(厦門)공항에 도착한뒤 다시 필리핀행 중국 남방(南方)항공에 올랐다.

필리핀은 黃씨의 안전보장을 위해 공항에서부터 일본 적군파 단속은 물론 10년전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필리핀 신인민군 동태파악까지 나섰다.치밀했다.

黃씨는 클라크공항 도착후 휴양도시인 바기오를 거쳐 마닐라에서 약 1백10㎞ 떨어진 막사이사이 군기지의 임시거처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했다.

黃씨는 매일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오전4시40분쯤 일어났다.아침.저녁으로 숙소 주변을 산책하거나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광범위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정부 관계자는“黃씨가 자신의 전공인 철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경제학.종교.역사등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일어.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영어도 신문.잡지를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전했다.이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집필작업을 계속했다.

黃씨에겐 우리측 요리사가 직접 만든 식사를 제공했으나 黃씨는 아침을 거른채 가끔 커피나 홍삼차로 대신했다.점심도 밥 반공기 정도가 고작이며 저녁은 샌드위치로 때우기 일쑤.

지난달 31일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친서를 갖고 반기문(潘基文)외교안보수석이 극비리 필리핀에 도착,라모스대통령을 면담했다.필리핀 정부가 黃씨의 조기송환을 요청해왔기 때문.潘수석은 중국과의'한달체류'약속을 설명하며 체류연장 필요성을

강조,필리핀측의 양해를 얻어냈다.

◇서울행=필리핀 도착 33일,한국 망명신청 67일만인 4월20일 오전7시 黃씨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한국 국적기도 군용기도 아닌 필리핀 여객 특별기가 이용됐다.그것도 필리핀 최대 항공사인 필리핀 에어라인이 아니라 전직 공군소장이 회장으로 있는 에어필리핀 보잉737기가 이용됐다.취재진의 의표를 찌르는 극비 수송작전이었다. [마닐라=유상철 특파원.최상연 기자]

<사진설명>

서울 품에…

20일 낮 서울에 도착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승용차를 타고

관계기관 요원의 경호를 받으며 서울공항을 떠나고 있다.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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