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새해 경제, 우리 하기 나름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97년 외환위기 때를 돌이켜 보자. 대부분의 전망은 L자형 회복이었다. 경제성장률이 상당 기간 정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V자형 회복세를 보였다. 98년 상반기 실적은 예상보다 더 나빴지만 하반기부터 급속도로 좋아졌다. 역설적이지만, 그 원인은 위기가 더 심화됐던 데 있었다. 아시아에만 머물 것 같던 금융위기는 브라질·러시아로 번져나갔고, 롱텀캐피털(LTCM)이 파산하면서 세계경제를 위협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이 두 달 동안 세 차례나 금리를 낮춘 것을 비롯해 주요 선진국들은 과감하게 돈을 풀었다. 그 덕에 한국도 금리를 대폭 낮출 수 있었고, 외국 자본도 빠르게 유입됐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을 빌리자면 ‘도전(challenge)’이 더 강해지니까 더 강력한 ‘응전(response)’이 나온 셈이다. 위기가 심해지는 상황만 놓고 미래를 전망하면 암울할 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경제는 항상 뜻밖의 행로를 걸어왔다. 그래서 경제사에는 ‘위기’나 ‘기적’이란 말이 즐비하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사태가 전례 없이 심각해지자 전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 미국은 제로 수준까지 금리를 낮췄고, 중앙은행이 기업어음을 사주고 있다. 일본과 유럽, 중국도 금리 인하 대열에 동참하고 재정지출을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다. 현재는 종이화폐 시대이기 때문에 도전에 대한 응전의 힘이 의외로 강할 수 있다. 돈을 찍어내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 국제 공조도 잘 되고 있다. 현찰을 움켜쥐고 있어 봤자 손해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거의 무한대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곧 인플레를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창조적이며 실효성 있는 경기부양책을 적극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원화 환율에 대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번 금융위기는 한국의 잘못이 아니다. 세계경제에 서브프라임이라는 핵폭탄이 터져 벌어진 것이다. 또 한국에 경상적자가 발생한 것도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탓이 크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벌어지자 한국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한국 잘못 들춰내기가 벌어졌다.

환율은 통화 간의 상대가격이다. 설혹 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상대방보다 잘못한 것이 더 많아야만 통화가치 하락이 합당하다. 그런데 원화는 이번 위기를 촉발한 문제투성이 나라 미국의 달러화에 대해 심할 때는 50% 이상 절하됐다. 이것은 우리가 10년 전 외환위기에 놀라서 ‘금융위기=외환위기’라는 패배주의적 등식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부동산 부문에 부실이 있다 하더라도 미국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600개가 넘는 건설회사들이 도산했다. 그런데 국내외에선 이런 국제 비교도 없이 무조건 한국의 문제라는 것들만 쳐다보면서 원화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횡행했다.

새해에는 특히 ‘경기가 더 나빠지면 원화가 더 약화될 것’이란 근거 없는 비관론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경기가 나빠지더라도 다른 나라들도 함께 나빠질 것이므로 원화만 유독 더 약해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국은 경기가 나빠질 때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강점을 갖고 있다. 재정 건전성이 세계적으로 좋은 편이고, 부실 문제를 최근에 다룬 경험이 있다. 부실 문제를 더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경상수지도 흑자로 돌아섰다. 한국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적자였을 뿐 줄곧 흑자국이었다. 원화 환율은 당연히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특히 경기침체기에는 수입 감소로 경상흑자가 예상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 98년에도 당초 50억~60억 달러 경상흑자를 예상했다가 4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어려운 때일수록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지난해에 환율 관리만 제대로 했어도 한국이 당한 금융위기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약력>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 매일경제 논설위원,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저서 『한국 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