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도>48.무대뒤의 사람들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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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영화처럼 연극도 종합예술이라고 한다.이 말은 연극은 언제나 무대 전면에 나서는 배우와 연출자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대라는'허구의'공간에서 인간의 오욕칠정을 리얼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무대미술.의상.분장.음향.조명등 숱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이들의 절대적 협조없이는 좋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바로 이러한 무대뒤의 숨은 일꾼을 우리는'

스태프'라고 통칭해 부른다.

지금껏 우리의 연극무대는 이들의 존재가치를 등한시해 왔다.이들을 어엿한 예술가로 보기보다는 한낱'기술자'로 하대하는 풍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변하고 있다.이들이 적당히 구색을 맞추기 위해 참여하는'들러리'가 아니라 때로는 가난한 연기와 연출을 보완해주며,때로는 그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면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발돋움하고 있다.

한 두명에 의존 심해

그런 예는 많다.지난 2월 초연됐다가 18일부터 앙코르 공연하는 뮤지컬'겨울나그네'.이 작품이 파격적인 신인 기용으로 인한 별다른 관객 흡입요인이 없었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게된 것은 무대미술의 도움

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장면에 맞춰 24차례나 바뀌는 다이내믹한 무대운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무대의 양감과 질감을 읽어내는 무대미술가 박동우의 섬세한 감각이 큰 몫을 했다는게 중론.보는 이들은“액자속에 담긴 한편의 회화를 보는 듯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 작품을 위해 필수적으로 구성되는 이러한'스태프'는 크게 다섯분야로 나뉜다.무대세트와 대.소도구의 디자인과 배치등을 담당하는 무대미술을 비롯,배우의 역할에 맞게 옷의 색깔과 분위기.양질감을 결정하는 의상이 있다.

여기에 객석과 무대의 거리,조명의 밝기등을 고려해 출연자들의 윤곽과 인상을 돋보이게 하거나 묻혀버리게도 하는 분장이 있으며,주제나 장면의 변화에 따른 음악효과를 담당하는 음향(음악)과 무대의 입체감을 높이는 조명이 추가된다.

현재 연극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야별 전문가들의 수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그렇다고 연극시장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도 아니다.그러나 문제는 천부적.예술적 재능이나 노력여하에 따라 한두사람에게 일이 집중됨으로써

오는 과부하다.

연극 분장분야만 11년동안 활동해 오면서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은 손진숙은“1년에 20~30편의 작품을 하다보면 한 작품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다.

비교적 타분야에 비해 인적구성과 수준이 탄탄한 곳은 무대미술과 의상쪽이다.신.구세대의 조화도 좋을 뿐더러 젊은이들의 관심도 부쩍 높아지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이다.

무대의상의 경우 극단 자유 대표인 이병복(박스기사 참조)을 비롯해 변창순.최보경.구희서(연극평론가협회장).김현숙(연극원 강사).이유숙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전문가들.노라로(나,김수임)와 하용수(겨울나그네)등 일반 의상디자

이너들이 무대의상을 맡을 때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전문성면에서 거리가 있다.

최근들어 유학파중 전문학위소지자도 속속 현장에 가담하고 있는데 뮤지컬'명성황후'를 통해 장중한 전통의상을 무대에 재현한 김현숙(미 일리노이대 예술석사)이 대표적이다.그는“아무래도 아직은 의상담당자의 의사가 1백% 수용되는 단계는

아니어서 연출자와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게 가장 힘들다”며 그러나“배우의 연기와 외형(의상)이 완벽하게 합일해야 그 인물의 성격이 살아난다”고 의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상 못지않게 한창 각광받는 분야가 무대미술이다.가끔은 직접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는 막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3D업종'이긴 하지만 작품분석과 무대메커니즘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결요건이어서 예술가로서의 성취감도 그만큼 크다.

최근까지도 이 분야는 일찍부터 현장에서 선배들에게 도제식으로 일을 익힌 원로들이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상당히'물갈이'를 한 상태.의상에 비해 남성들이 강세인데 윤정섭(연극원교수).이태섭(용인대교수).박동우가'남성 빅3'를 이룬다.3

0대 초반의 이학순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여성으로는'문제적 인간 연산'의 신선희(무대예술아카데미교수)와 김효선의 활약이 빛난다.

분장은 앞서 말한 손진숙 외에 김기진.구유진이'진 트리오'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이 각 작품에 대한 인물 컨셉트를 정하면 제자 3~4명씩 팀을 이뤄 동시다발로 지원하는 형태를 취한다.이런 분업화는 무대미술의 경우와 같다.

조명과 음향은 직접 기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직도'기술자'란 인식이 강한편.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무대운용이 불가능해 그 막중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대개가 극장에 소속돼 직장인 신분으로 활동하는데 한철.조갑중.한동근(이상 문예진

흥원)과 박영철.최형우.이상봉(이상 예술의전당).신성우(정동극장).신호(연강홀).정형근등이 대표적인 전문가들이다.

역할 비해 대우소홀

그러나 분야를 불문하고 이들에 대한 예우는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다.역할에 대한 중요성은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전문인에 합당한 대우(돈)는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아쉽다.무대나 의상.분장에 대한 순수 디자인료(재료비 원가등 제

외)는 많아야 작품당 3백만~4백만원 정도가 고작.다 합해봐야 총 제작비의 10%를 넘기지 못한다.

아무튼 앞으로 우리 공연문화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열쇠는 이'무대뒤의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와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한 무대디자이너는“아직도 흥행에 실패하면 극단 운영이 힘들다는 이유로 돈을 떼먹는 경우도 더러 있

다”며“예술가적인 자존심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재왈 기자〉

<사진설명>

김현숙씨의 뮤지컬 '명성황후' 의상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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