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리스트든 뭐든 철저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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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검찰이 박연차(63·구속) 태광실업 회장에게 불법적인 돈을 받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를 밝혀내는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노무현(62) 전 대통령이 박 회장에게 15억원을 빌렸다는 차용증이 기폭제가 됐다.

◆금품수수 정황 포착=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포함한 연루 정치인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이미 상당수 정·관계 인사의 금품 수수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7~11월까지 태광실업의 세무조사를 벌인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광범위한 조사 자료를 받아 스크린을 해왔다. 노 전 대통령의 ‘15억원 차용증’도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포함돼 있었다. 검찰이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넘겨받은 서류는 사과박스 70여 개 분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 중에는 박 회장이 만난 정치인 명단과 선물 전달 내역 등을 정리한 문건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검찰은 이와 함께 박 회장의 계좌를 꼼꼼하게 추적하고 있다. 정황 자료와 함께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해서 박 회장의 ‘닫힌 입’을 열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보름에서 한 달쯤 지나면 뭔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수사에 진척이 있음을 내비쳤다.

대검 고위 관계자도 “새해부턴 2라운드 수사가 펼쳐질 것”이라며 수사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당초 “리스트는 확인한 바 없다”며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검찰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전까지는 노건평씨와 박연차 회장을 기소하는 데 총력을 쏟느라 시간이 없었다. 이제 ‘리스트’든 뭐든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 긴장= 검찰이 박연차 리스트 수사에 자신감을 보이자 정치권은 긴장하는 분위기다. 30일엔 민주당 최철국 의원이 박 회장 측으로부터 7000만원을 빌렸다 갚은 사실이 알려져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했다. 최 의원은 “수표로 돈을 빌려 법원에 공탁했다가 이자를 합쳐서 갚았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이처럼 외부에서 돌출되는 변수에 조심스럽게 대응하고 있다. 금품 거래 정황만으로 요란하게 정치인 수사를 벌였다가 사법처리를 못하면 오히려 검찰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검 최재경 수사기획관은 “박 회장의 계좌 추적 과정에서 최철국 의원 등 정치인에게 돈이 건너간 단서는 포착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른 수사 관계자는 “‘박연차 리스트’라는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는 성과가 나오려면 치밀하고 차분하게 수사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15억원 차용증도 속도 조절을 해가면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우선 두 사람 사이에 실제 금전 거래가 있었는지, 단순한 사인 간의 돈 거래인지 등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이다. 또 박 회장이 돈을 빌려줬다면 대가성은 없었는지, 이자는 지급됐는지 등도 조사돼야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의혹도 정치인 수사라는 큰 틀 안에서 진행시킬 계획이다. 계좌 추적 등 객관적인 자료를 충분히 축적한 뒤에 사실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조사를 서두르면 전체 수사의 틀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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