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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벌>17. 하토야마家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하토야마(鳩山)가문에서 혁명의 피비린내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인생드라마는 느껴지지 않는다.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근대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에서 평범한 시골무사의 후손들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명가(名家)를 일궈냈다.

하토야마가는 1백30여년에 걸쳐 4대연속 국회진출,총리.중의원의장.외상 배출이라는 신화를 쌓아 일본제일의 정치명문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가문의 주역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50)민주당대표와 같은 민주당의 구니오(鳩山邦夫.49)형제.이중 유키오 대표는 지난해 1월 잡지 문예춘추 신년호가 발표한'정치부기자 1백7명이 뽑은 21세기 일본의 리더'기획특집 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유키오가 간 나오토(菅直人)의원과 함께 이끄는 민주당은 요즘 자민.신진당의 보수대연합 흐름에 맞서 사민당.태양당.사키가케등을 아우른'비(非)보수 비 공산'세력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다.

현대의 하토야마가는 유키오의 증조부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에서 출발한다.가즈오의 부친 하토야마 히로부사(鳩山博房)는 오카야마(岡山)현의 사무라이(무사계급)였다.두뇌가 명석했던 가즈오는 1875년 도쿄대의 전신인 가이세이(開成)

학교 법률과를 졸업하면서 문부성이 주관한 제1회 해외유학생시험에 합격해 미국 컬럼비아대에 유학하게 된다.시험직전 1주일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공부에 몰입하다가 치아 전부가 들떠버려 유학시절 내내 치통으로 고생한 일화는 일본사회에서 유명하다.가즈오는 귀국후 변호사로서 도쿄부의원.도쿄대강사를 거쳐 외무차관.중의원의장.와세다대총장을 역임하며 명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닦았다.

가즈오는 같은 무사계급의 딸이자 도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한 재원인 하루코(春子)와 결혼해 이치로(一郎).히데오(秀夫) 두 아들을 두었다.하루코는 교리쓰(共立)여자대학을 창립한 여성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치로.히데오 형제는 다같이 도쿄대를 졸업했다.장남 이치로는 정계에 진출,1954년부터 2년간 일본총리를 역임하면서 일본의 유엔가입.옛소련과의 국교정상화등의 업적을 남겼다.도쿄대 법학부 교수를 지낸 히데오는 일본 민법학계의 태두(泰斗)로 불린다.

하토야마가는 이치로대에서 재벌가문과 결합하게 된다.이치로의 아들 이이치로(威一郎)가 일본 굴지의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의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郎)의 딸 야스코(安子)와 결혼한 것이다.이치로와 사돈을 맺은 이시바시는

보수정치가 이치로에게 풍부한 자금을 제공해 1950년 보수정당 자유민주당이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이시바시의 다른 딸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전총리의 부인이기도 하다.

중의원의원.외상(후쿠다내각)을 지낸 이이치로의 아들이 바로 유키오.구니오 형제.외가의 재력이 이들 형제의 정치활동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모친 야스코와 두 형제의 재산은 현재 5백50억엔(약3천9백억원)대로 추산되고 있다.

하토야마 형제의 결혼상대는 부친과는 대조적이다.유키오는 유명 가극단 다카라즈카(寶塚)출신의 미녀이자 유부녀이던 미유키(幸)를 미국유학시절 만나 열애끝에 결혼했다.구니오도 73년 당시 겨우 18세이던 탤런트 에밀리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에 골인했다.

하토야마가에서는 특히 여성들의 내조가 두드러진다.가즈오의 부인 하루코는 매일 오전3시에 두 아들을 깨워 의식적으로 영재교육을 시켰다.이치로의 부인 가오루(薰)는 아들 이이치로의 정계진출 초기에 어려운 일본민요를 함께 연습함으로써 아들의 목청을 단련시켰을 정도다. [도쿄=노재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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