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민심을 키우는 사회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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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보청문회는 우리 사회체제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현재의 우리 국회청문회제도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식 제도를 흉내 낸 것이다.그런데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낼 일이지 겨우 그 거죽만 흉내내고 말았다.그러니 청문회가 정치연설이나 도덕론 강의실은 될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는 장소가 될 수 없음은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그럼에도 마치 새로운 사실이나 캐낼 수 있을 것처럼 허풍만 떨어 결국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준 것이다.

미국인들이 청문회에서 비교적 정직하고 소상한 답변을 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법적.제도적.풍토적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처음부터 우리보다 더 정직하기 때문은 아니다.

첫째로 미국에는 답변협상이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제도가 있다.피의자를 기소한후 피의자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검사와 변호사가 협상을 해서 형벌을 감경(減輕)해주는 제도다.

둘째로는 기소면제제도가 있다.가령 마피아와 같은 범죄조직에 대한 수사때 조직원으로 하여금 조직의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 대신 그 개인에 대한 기소는 면제해 주는 제도다.

셋째 내부자 고발제도다.한마디로 이문옥(李文玉)씨 사건과 같은 경우다.

진실규명을 위한 이런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두는 대신 발뺌이나 거짓말에는 엄한 처벌을 하고 있다.

죄를 그 죄값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흥정하는 듯한 이런 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이런 법적 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진실규명은 한결 쉬워지며 진실규명을 위해선 작은 불합리나 불공평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생각이다.

미국 의회청문회는 이런 법적.제도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아울러 청문회를 실제로 이끌어가는 것은 변호사.회계사.국제법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 조사관이나 의원의 참모들이다.

우리처럼 주로 풍문이나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오랜 시일에 걸친 철저한 조사로 충분한 자료를 모아 의원들을 철저히 훈련시킨다.그러니'아니다''모른다'식의 발뺌을 쉽사리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경우처럼 검찰을 포함한 행정부가 “잘해 보슈”하며 돌아서 있지도 않다.요구하면 연방수사국(FBI)기록까지도 내주면서 청문회준비에 협조를 하고 있으며 정보공개법등의 관련법이 그를 보장하고 있다.이러한 미국의회 청문회조

차 벽에 부닥치는 일이 적지 않거늘 하물며 거죽만 흉내낸 우리국회 청문회가 어찌 벽에 안 부닥치겠는가.

그뿐인가.우리 국회는 적어도 정태수(鄭泰守)씨가 보기에는 코웃음칠 대상밖에는 안될 것이다.그러니 국민앞에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호통치며 다그쳐도'모른다''말할 수 없다'로 딱 잘라버리고 눈감아버릴밖에-.국회의 권위가 무너질대로

무너져내린터라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청문회의 의미를 역설해도 증인들에게는 도저히'역사의 법정''양심의 법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정태수씨등에 의해 청문회가 농락당하는 원인은 또 있다.우리의 지난 역사는 진실을 규명하는 세월이 아니라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역사였다.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백범(白凡) 암살사건의 진상 하나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는게 우리 사회다.멀게 돌이켜 볼 것도 없다.문민시대가 왔다지만 김형욱(金炯旭)사건은 아직도 미스터리다.5,6공때의 그 숱한 의문사(疑問死)들은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 있다.이런 사회풍토에서는 진실을 감춘다고 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

이고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긍지를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한보의 자금동원책이었던 김종국(金鍾國)씨는 鄭씨의 하수인에 불과했고 죄값이나 죄질도 鄭씨와는 저울질할 대상도 안 되건만 답변자세는 鄭씨와 똑같지 않던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진실규명이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는 진실규명에 높은 가치를 둘 만큼 그 사회의 양심의 눈금이 높아야 한다.그런데 그 양심의 눈금은 저절로 올라가는게 아니다.사회구성원들의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D H 로렌스는 이런 말을 한 바 있다.“양심이라는 것은 코 아래 수염처럼 나이에 따라 자라는게 아니다.우리는 양심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즉 양심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이다.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경험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과 양심은 별개의 것이다.”

유승삼 (출판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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