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공장 본관 앞 농성 천막 사라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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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04면

#1. 26일 오후 3시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앞.
길 양편 주차라인을 따라 승용차가 빼곡히 차 있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은 종종걸음이라 금방 시야에서 사라진다. 항상 주차라인에 늘어서 있던 노조의 농성 천막과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던 확성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노조가 에쿠스 승용차 단종으로 일감이 없어진 울산2공장 에쿠스 생산라인 근로자 498명을 옆 공장으로 보내는 인사발령(전환배치)에 합의해 준 직후 지난 10일 자진 철거한 것이다.

현대차 노조도 바뀌나

“주차장에 천막 대신 차가 있고, 한창 일할 시간에 조용한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우리 회사에선 노조가 생긴 이래 20여 년째 기억에서 사라졌던 풍경이었습니다.”(노진석 홍보담당 이사)

일감이 줄어든 곳에서 넘치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는 ‘전환배치’는 그동안 노조의 반발 때문에 극소수 희망자 외엔 엄두도 내기 힘든 사안이었다. 2005년 노사 단체협약 협상 때 반드시 노조의 합의를 거치도록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2. 23일 점심시간 현대차 사내 식당 등에 배포된 현대차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소식지.
“회사의 비상경영선언, 좌시하지 않겠다. 4만5000 조합원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종전이라면 소식지 헤드라인을 차지했을 이 내용이 모퉁이로 밀려나 있었다. A4용지 앞뒤를 가득 채운 주 내용은 비상경영 문제와는 동떨어진, ‘유회된 정기 대의원대회 24일 속개’ 소식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곧바로 반발 대자보가 나붙고, 본관 앞 규탄대회→파업으로 이어지던 수순은 전혀 없었다. 회사의 비상경영 내용에 포함된 ‘조업 단축’은 임금 삭감을, 혼류 생산(한 개 라인에서 여러 차종 생산) 체제 구축은 금기시됐던 물량이동(주문량이 넘치는 공장에서 부족한 공장으로 일감을 넘기는 것) 강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상경영을 거부하는 거냐”는 질문에 장규호 노조 대변인은 기겁했다. “위기에 공감한다면서 말이 되는 소리냐. 위기 극복에 머리를 맞대기로 한 회사가 일방적으로 비상경영 방침을 발표한 데 대한 유감 표명일 뿐이다.” 이날 울산공장의 고참급 노조원인 조장·반장 900여 명은 ‘비상경영체제 동참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다.
현대차 노조가 달라지고 있다. 2일 자청해서 회사 측으로부터 경영설명회를 듣고는 “회사가 외환위기 이래 최대 위기라는 데 공감했다. 노조도 고용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위기 극복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입장을 정리했다고 한다.

특근·잔업만 줄여도 파업을 벌이고, 쇠고기 파업 등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공장을 세우고, 근로 시간은 줄이되 임금은 깎지 말라는 억지를 부려 한 해의 3분의 1을 꼬박 임금·단체협약 협상으로 지새웠던 과거 모습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 사무실 입구엔 이런 분위기를 무색하게 하는 대자보들이 아직 버티고 있다.

“아반떼 HD 하이브리드카를 다른 공장에 넘기면 좌시하지 않겠다.” (3공장의 노조 대의원)

“정년 퇴직자의 (편한) 빈자리는 5공장 조합원을 우선 배치하라.” (5공장 대의원회)

이두철 울산상의 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당시를 회고했다. 임금 삭감·순환무급 휴직을 요구하는 회사와 임금 동결이 마지노선이라고 버티던 노조가 충돌 끝에 8000여 명의 대량 해고 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회사는 일자리를 지켜주고, 노조는 일자리 공유를 통한 고통 분담을 감수해 이번 위기를 노사 간 윈-윈의 기틀을 다지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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