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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살리자 <상> 개관 40년 만에 천덕꾸러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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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간판 소장품인 백남준의 ‘다다익선’ 옆을 지나가는 중학생 관람객들. 동선 안내도, 작품설명원도 없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제대로 된 미술 감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30분 만에 돌아갔다. [과천= 강정현 기자]


 칼바람이 불던 18일 오전, 썰렁하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단체관람을 온 4개 중학교 3학년생들로 떠들썩해졌다. 한 학교에서 200∼300명씩, 1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몰렸다. 11시 정각 미술관 입구에 모인 학생들은 1시간 동안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때마침 미술관의 최장수 기획전인 ‘젊은모색’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선정한 2, 30대 유망주 17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다. 하지만 전시를 설명해 줄 작품 설명원도, 동선 안내도 보이지 않았다. 전시장을 지키는 작품 관리원만이 간간이 “손대지 마세요” 소리를 지르거나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작가의 이름과 제목, 재료 정도만 간단히 표기된 안내판에 다가가 갑론을박하던 학생들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시장을 나왔다.

“지하철 타고 셔틀버스 갈아타고 수원에서 1시간 걸려 왔는데 별 소득도, 재미도 없다. 차라리 옆 서울랜드에 갔으면 싶다”(김상권·15)는 게 모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학생들이 볼멘 목소리로 털어놓은 소감이다.

이날 관람객은 1305명, 이 중 933명이 단체 관람을 온 학생들이었다. 미술관 측은 “작품 설명원이나 도슨트(전시를 안내하는 자원봉사자)는 정해진 시간에 나와 일하며, 중고생 단체관람객을 대상으로는 간단히 전시장 예절을 안내한 뒤 자유롭게 감상하도록 한다”고 해명했다. 미술관을 찾는 단체관람 학생은 연간 방문자수의 17%를 차지한다. 특히 주말과 공휴일을 뺀 평일 관람객은 3분의 2 이상이 단체관람객이다. 미술관 교육을 담당하는 팀이 있는데도 이들을 위한 미술 감상 교육은 외면하고 있다.


◆ 국립 미술관 맞나?= 미술관은 미술품에 대한 연구성과를 전시로 보여주고, 전시나 관련 프로그램으로 대중을 미술에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곳이다. 즉 미술에 대한 연구·전시·교육기관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기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인상적인 전시가 없다”(미술평론가 최열), “수천 점의 소장품 중 주제에 맞는 것을 엄선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할 전시가 그저 시대순으로 작품을 나열해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김선정 교수) 등 전문가들의 비판도 따른다.

‘한국 미술의 수장’이라는 표면적 지위와는 달리 미술계도 대중도 외면하는 ‘낙도(落島)’. 이것이 내년이면 개관 40주년을 맞는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에 내려진 불명예스런 별명이다.

관람객수도 줄어들고 있다. 2000년 85만 311명에서 지난해 43만4248명으로 반토막났다. 미술시장 호황을 거론할 정도로 미술에 대중의 시선이 쏠린 시기여서 그 박탈감은 더하다.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고 한국미술을 향한 세계의 눈길이 모아진 이때 그 관심을 하나로 모아내야 할 곳이 국립현대미술관이건만 응집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문화부 박순태 예술국장)는 지적이다.

과천=권근영 ·이에스더 기자


외면받는 이유는
정파적 운영 … 볼만한 콘텐트가 없다
정치적 판단따라 전시·수집
공부 안하는 학예실도 문제

국립현대미술관은 왜 외면받을까. 동네북처럼 수시로 엊어맞으면서도 어찌하여 개선되는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일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게 접근성이다. 가고 싶을 뿐, 과천의 서울대공원 한가운데 있어 찾아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위치만 해결되면 될까. 미술계에 화두를 던져주는 인상적인 기획전이 없다, 상설 소장품전도 그저 장르별·시기별로 작품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미술관이 왜 세금을 들여 이 작품을 구입했고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 등등이 미술관 전시에 대해 전문가들이 누누히 지적해온 점이다. 미술관 심동섭 관장 대행(기획운영단장)은 “콘텐트만 좋으면 접근성 문제는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을텐데 지금까지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고민만 해 온 게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콘텐트 부족은 연구 안 하는 학예연구실 탓이 크다. ‘미술관의 꽃’이라고 불리는 큐레이터들이 포진한 곳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엔 미술사 등을 전공한 석·박사급 큐레이터 12명이 있다. 평균 10년차다. 그러나 이곳의 연구성과는 연 1회 발간하는 ‘현대미술관연구’ 뿐이다.

문화부 용호성 예술정책과장은 “유일한 국립미술관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는데도, 이곳 큐레이터들은 미술계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가 책이나 논문을 내면 세계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과 대조적이다”라고 꼬집었다. 한 마디로 스타가 없다는 얘기다. 미술 월간지 ‘아트프라이스’는 24일 미술인과 전시장 방문객 등 1만5573명을 대상으로 한 해 동안 조사한 설문을 발표했다. 그 중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적 인물’ 10위권에 국립현대미술관장 및 큐레이터는 아무도 없었다.

미술관장의 리더십 부족도 문제가 됐다. 김윤수 전 관장의 해임사유는 표면적으로 소장품 구입시 가격 산정과 절차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점이었다. 정작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은 다르다. 이인범 상명대 교수는 “미술관을 정파적으로 운영했다. 전문가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전시와 수집을 했다”고 지적했다. 미술계 좌파 인사로 거론되며 전 정권서 임명된 김 전 관장이 미술관의 권위를 뒷받침 할 객관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장기적 비전 마련이 어려운 시스템도 지적된다. 관장의 임기는 3년이며 한 번 연임할 수 있다. 해외 유수의 미술관은 다르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의 알프레드 파크망 관장은 10년째 일하고 있으며, 올해 사임한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의 토마스 크렌스 전 관장도 무려 20년을 재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실장은 이보다 더하다. 큐레이터들을 통솔하는 가장 윗사람인데도 2년 계약직이다. 전시 준비에 보통 2년쯤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전임자가 마련해 둔 기획안을 따라가다가 임기를 마치게 되는 셈이다. 그나마도 최승훈 학예실장은 최근 계약이 만료됐다.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은 관장과 학예실장이 모두 공석인, 선장없는 배다.

권근영·이에스더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김현일 인턴기자(서울대 동양화과 3)가 이 기사 작성을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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