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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고함(孤喊)] 미션 임파서블 『한한대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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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항상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신동엽(申東曄·1930~69)의 시의 세계에는 토착적 민족 정서의 울분이 배어 있다. 그 울분이 서정적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만년의 그윽한 사맥(史脈)의 향기를 타고 살아 있는 우리 가슴에 울려 퍼진다는 데 그 짙은 생명력이 있다.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만 기억하지만 그가 해방 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1953) 사학도였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그의 심령에 민족의 사혼(史魂)을 불어넣어준 이가 바로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신채호와 더불어 민족 사학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대한매일신보에서 예봉을 휘둘렀고, 일제 강점 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권업신문의 논설을 써서 민족정기를 이끌어갔다.

단국대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독립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대면서 만주벌판과 형무소를 들락거렸던 평북 용천사람 장형(張炯·1889~1964)이 해방되면 정계에 나가지 말고 교육사업에 전념하자고 약속했던 친구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로부터 거금의 희사를 얻어 설립한 해방 후 최초의 4년제 인가대학이다(1947).

가계유식화탕근(家鷄有食火湯近)

야학무량천지관(野鶴無糧天地寬)

집에 기르는 닭은 모이는 있지만 불에 펄펄 끓는 탕수가 늘 가까이 있고, 들에 사는 학은 식량을 대주는 이 없으나 자유롭게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넓은 천지가 전개되어 있다는 뜻이다.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일수록 의존과 무력과 귀속의 심리를 버리고 자주와 자활과 자강의 의기를 발휘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장형의 건학정신이다. 이 자주와 자립의 기틀을 그는 민족사학의 태두 장도빈을 초대 학장으로 모심으로써 정립하였다. 이미 단국(檀國)이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민족사학의 학통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불과 다섯 개 학과로 출발한 대학이지만 민족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사학과를 당초부터 주축 학과로 삼았던 것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한한대사전』은 같은 획수 내의 글자와 표제어 배열이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다. 왼쪽부터 장호성(단국대 총장), 윤내현(동양학연구소 소장), 필자. [임진권 기자]

장도빈은 강단에서 독립도 껍데기 독립이요, 민주 운운하지만 껍데기 민주라고 외쳤다. 그러한 장도빈의 열변과 독설 속에서 신동엽의 시심(詩心)이 출렁거렸던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 역사는 가라! 껍데기 학문은 가라!

나 도올은 이미 어릴 적에 한학에 뜻을 두었다. 서양 학문만 따라가다 보면 주체를 상실할 뿐이라는 자각이 어린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그리고 대만 유학을 갔고, 일본 유학을 갔다. 그리고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선생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을 만났다. 모로하시는 단국대학의 설립자인 장형과 같은 고향사람인 함석헌이 동경고사(東京高等師範學校)에 유학하던 시절 그를 가르쳤던 한문교수였다.

이 모로하시가 출판사 대수관(大修館) 사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대한화사전』의 대업에 착수한 것이 1927년, 그리고 그 방대한 13권 전질을 완성한 것이 1960년이었다. 1945년 2월 대공습으로 제2·3권이 전화에 소실되어 버린 불행한 사건도 있었고, 또 모로하시는 실명의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13권을 다 완성했다. 4만9000여 자에 달하는 한자의 뜻을 모두 밝히고 그 글자에서 파생되는 단어와 그 단어의 중국 전적상의 출전을 모조리 밝힌 모로하시의 작업은 한 인간의 업적으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모로하시 선생은 내가 동경대학 유학 시절에 살아계셨다. 그리고 나는 선생을 뵈면서 그를 능가하는 한학의 기초작업을 완수해 보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1982년 귀국했을 때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에서 이미 4년 전에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의 위업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그 작업이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이 들었지만 반드시 위대한 결실을 맺으리라는 신념과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껍데기 학문은 가라! 그것은 하나의 사전이 아니라 민족사학의 정화였고 국학(國學)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그 모든 난관을 돌파시킨 인물이 바로 장형의 아들 장충식이었다. 장충식은 서울사대에서 역사공부를 했고,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명대면업고 (明代綿業考)’라는 논문으로 석사를 받았다. 그는 단국대 총장이기에 앞서 사학도였고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한 로맨티스트였다. 그에게 『한한대사전』의 사명을 심어준 사람은 정재각(鄭在覺) 선생이었다. 나도 고려대 재학 시 선생의 훈도를 받았지만 그는 공·사가 치열하게 분명한 비전의 인간이었다.

올 10월 28일, 착수한 지 30년4개월 만에 16권 『한한대사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5만3667글자의 뜻을 밝히고, 42만 269단어의 뜻과 출전을 모두 밝혔다. 자전(字典)이 아닌, 사전(辭典)으로서는 세계 최대! 그 위업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우리식 한자, 그리고 우리식 한자용어, 우리 인명, 지명, 제도명, 이두용어, 향찰, 구결 등 약 8만4000단어의 출전을 밝힌 『한국한자어사전(韓國漢字語辭典)』 전 4권은 국학의 가장 위대한 초석이라고 평할 만하다.

쏟아 부은 돈만 해도 310억! 일석 이희승 선생을 비롯, 이강로·김동길·허호구 등 우리나라 유수 한학자들의 손때가 거친 이 위업에 우리 민족은 존경의 염을 표해야 한다. ‘대운하’라는 즉물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4대 강 정비사업’이라는 눈속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세태에 『한한대사전』의 위용은 보이지 않는 문화적 가치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경종(警鐘)이요, 효종(曉鐘)이요, 범종(梵鐘)이다. (031-8005-2622)

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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