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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宗家)는 살아있다 - 우리 정신의 주춧돌 되찾기 바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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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아담(Adam)이란 성(姓)을 가진 네 사람의 첫 만남.“어디 아담이세요?”“프랑스요.” “이런 반가울 데가,저와 본(本)이 같네요.” “댁은요?” “저는 네덜란드 아담입니다.” “저는 독일인데.”

지금 인터넷에선 이런 말들이 자주 오간다.최근 서구사회에 일고 있는 ‘뿌리찾기’붐 때문이다.자신의 시조(始祖)탐구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휴스턴씨 아일랜드 종친회’‘퀘이트가(家)스코틀랜드 문중모임’같은 것들이 속속 생긴다.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성을 묻고 본(本)과 돌림자를 확인하는게 우리만의 풍습으로 알았건만.

그러나 우리에겐 그들이 넘보지 못할게 있다.수백년동안 대를 물려 이어온 지(智)와 예(禮)의 터전-종가(宗家)가 바로 그것이다.더욱이 서양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인고의 세월속에서 가문을 지켜온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아직 건재하다.

고산(孤山)윤선도(尹善道)의 해남 윤(尹)씨 종가를 19대째 지켜온 종손 尹형식(64)씨.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일과 합작회사를 세우던 지난 60년까지만 해도 尹씨는 의욕에 불타는 젊은 사업가였다.그런 그가 번창하던 사업을 미련없이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75년.종가를 돌봐온 부친의 건강악화 때문이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가문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집안의 기틀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지요.” 그 뒤로 尹씨는 옛 어르신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낡은 사당을 보수하는등의 문중 일로 20여년을 보냈다.아이들에게는 가문의 가르침을 담은 충헌공가훈서(忠憲公家訓書)를 배우도록 했다.근심을 갖고 찾아오는 집안사람들을 언제나 반갑게 맞아들였고 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부인 金은수(60)씨 역시 결혼하던 25세를 기점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혼례를 치른 직후부터 남편과 떨어져 해남에 살면서 시할머니께‘종가 며느리’수업을 받았다.1년에 제사만 20여일. 오전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집안청소로 하루를 시작했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과 과객(過客)접대상을 차리고 제사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학창시절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도 金씨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항상 긴장하고 있어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합니다.그러나 수백년을 이어온 집안의 명예와 전통을 지킨다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견디는 것이지요.”

고택(古宅)을 지키고 있는 경우라면 다른 종가도 사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하회마을의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종가를 지키고 있는 14대 종손 柳영하(69)씨도 그렇다.젊은시절 한때 서양의학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부친이 작고하자 10년 서울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30년 세월이 흐른 이제 그는 다른 가문 사람들과 교우를 즐겨하는 영락없는 옛 양반이 됐다.

종가엔 아직도 사라진 옛 관습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한 예가 신분제도.공식적으로 폐지된지는 이미 오래지만 몇몇 종가에는 70년대 중반까지 집안일을 돕는 가족들을 뒀다. 이젠 다들 흩어져 살지만 대사가 있을 때면 찾아와 일을 돕곤 한다. 나이 70~80줄에 접어든 이들이 아마도 오랜 신분역사의 마지막 증인일 것이다.

세월의 흐름따라 종가의 위상도 변하는 법.놀라운 건 80년대까지 계속 약해지는 듯싶던 권위가 10여년전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새롭게 찾아오는 문중사람들도 늘어났고 다른 가문에서도 발걸음이 잦아졌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엿보인다.지난 여름 성주 이(李)씨·울산 김(金)씨 종친회등에서는 젊은세대를 위한 ‘집안 캠프’를 열었다.대전시 중구청에서는 7월 완공을 목표로 침산동에 각 가문의 기념조각을 전시할 ‘성씨 조각공원’건립을 추진중이다.나주시의 경우 이미 90년에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60여개 성씨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성향(姓鄕)공원을 건립했다. 이런 현상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른 여유에서 비롯되는바 크다.그렇다면 예부터 ‘수원 백씨’‘안동 장씨’해왔던 우리가 뒤늦게‘바흐만 백(Beck)씨’‘노르망디 장(Jans)씨’라 부르기 시작한 서양의 변화와 행보를 함께하는 이유는 무얼까.

종가에 마음을 빼앗겨 15년간이나 연구에 몰두했던 서울대 이순형 교수의 설명.“서구학문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종가를 연구하면서야 비로소 우리 조상들의 교육철학이나 생활사상에 담긴 심오한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물질문명의 격랑속에서 떼밀려 살아온 우리들의 공허함이 오늘 문득 정신을 중시하던 어른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의 연구를 마무리하고 있는 李교수는 젊은 자식들에게 보다 합리적인 대물림을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하는,또 제사음식의 가짓수는 유지하면서도 양은 줄여 낭비를 막으려는 종손들의 합리적인 노력들에서 더욱 굳건해질 종가의 미래를 본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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