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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갈등 예고한 17대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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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드디어 17대 국회의 시작을 알리는 막이 올랐다. 17대 국회는 여러 정파들이 다양한 전선에서 대결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과 함께 진보적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됐다는 사실은 주요 쟁점에 관한 이념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어느 설문조사 결과에 드러난 17대 국회의원의 이념적 성향 분포가 눈길을 끈다. 당선자의 39.5%가 '진보', 23.5%가 '중도', 35.6%가 '보수'라고 답했다. 전체적인 구도로 볼 때 진보로 약간 쏠려 있지만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 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17대 국회활동의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양극으로의 쏠림이 더욱 심화할 것인지, 아니면 '중도'로의 몰림 현상으로 양극화가 완화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이다.

열린우리당이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민노당 쪽으로 기운다면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이념대결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진보진영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보수세력이 결집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열린우리당이 중도보수세력을 포섭함으로써 지지기반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펼친다면 중도세력이 힘을 얻는다.

'진보' 쪽으로의 쏠림과 '중도' 쪽으로의 몰림 중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가 열린우리당의 숙제였다. 그래서 '개혁'과 '실용'사이에서 고민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세대 특강에서 이 숙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盧대통령은 '진보'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열린우리당에 중요한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 쪽으로 방향을 확실히 잡아가면서 개혁을 추진하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와 만나 논의해 본들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도 이어졌다. 여기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여당의 당의장은 盧대통령이 내세운 '진보'와 '보수'의 구분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일 태세다. 정치판이 또다시 격전장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상생정치가 가능해진다. 개혁정책이 타당성과 유용성을 검증받기 위해서는 합리적 비판세력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아는 지혜와 여유가 필요하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들까지 변화를 거부하는 '반개혁' 세력으로 낙인찍어 놓은 채 어떻게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내려는지 알 수가 없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지 말고 개혁의 공동주체로 끌어안을 수는 없는가? 합리적 진보주의자들과 합리적 보수주의자들 간에 벌어지는 품격 있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개혁의 내용을 다듬을 수는 없는가?

盧대통령은 '보수'를 "힘센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 혹은 "시장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모든 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을 진보주의자로 간주했다. 그런데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이런 방식 자체가 논란거리다.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고 보는 흑백논리를 활용해 '보수'를 타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타파의 대상과 어떻게 상생할 수 있겠는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대통령의 선전기법과 다를 바 없다.

盧대통령이 내세운 구분방식대로라면 盧대통령 자신은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켰다. 지난 두 번의 선거경쟁에서 승리한 '힘센 사람'은 바로 盧대통령 자신이다. 이제 여대야소의 정국이니 거대 야당으로부터 핍박받는 약자인 척하는 처세술은 더는 통하지 않을 듯하다. '힘센 사람'이 돼버린 盧대통령이 정국을 '마음대로' 운영하고 싶은 욕심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盧대통령은 자신이 정한 잣대에 의해 보수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런 어색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윤영철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