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솔부는새바람>1. 출판 - 역사에서 찾는 先人의 슬기 생활史가 얽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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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촉촉한 봄비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자 파릇한 새싹들이 찌든 지표(地表)를 뚫고 나온다.경제위기와 정국불안의 세태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는 문화권의 몸짓은 수그러짐이 없다.지금 문화계 곳곳에서 불어오는 ‘새바람’들을 분야별로 짚어본다.[편집자주]

요즘 대형서점 건축코너를 둘러본 독자라면 예전과 다른 현상 하나를 주목하게 된다.기술·공학 전문서보다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가 부쩍 늘어났다.예컨대 지난해 축성 2백주년을 맞은 화성(華城·전 수원성)과 수원을 다룬 책만 해도 ‘18C 신도시 20C 신도시’(발언),‘꿈의 문화유산,화성’(신구문화사),‘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발언)등 3종이 나왔다.모두 과거의 평면적 재현을 넘어 조선후기의 뛰어났던 건축문화를 재해석한다.건축이 건물을 짓고 허무는 단순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체취를 담은 ‘생활그릇’이라는 뜻에서다.서점가에는 비슷한 입장의 책으로‘지붕 밑의 작은 우주’(살림),‘한국현대건축 50년’(재원)등 몇달새 10여종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음지(陰地)에 갇혀있던 ‘사람살이’가 출판계 주요 소재로 부상하고 있다.먹고 자고 옷입는등 ‘소소한’일로 치부됐던 일상생활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받기 시작한 것.건축·패션·음식·매너·문자,심지어 화장실까지 생활사적으로 조망한 단행본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정치·경제사에 집중됐던 역사서들이 영역을 넓혀 삶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양상이다.

세기말 혼돈을 꿰뚫는 혜안을 그리스·로마·인도·중국등 고대문명권에서 찾으려는 인류학·고고학의 줄기를 이어받으며 ‘잔가지’가 계속 확산되는 추세다.독자들의 반응도 좋아 교보문고 인문담당 박미영씨는“지난해말보다 생활사·풍속사 매출이 20%가량 늘었다”고 말한다. 최근 번역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까치·전6권)와 ‘문명화 과정Ⅰ’(한길사)은 이런 물결의 중심을 잡아준다.‘물질…’는 15~18세기 산업화

이전의 의식주를 치밀한 실증으로 되살렸으며‘문명화…’은 식사·생리욕구·코풀기·침뱉기·침실행동등을 통해 문명의 전개과정을 추적한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더욱 흥미롭다.‘…수수께끼’나 ‘…불가사의’등의 제목으로 단편적 지식을 끌어모았던 단계를 넘어 특정분야를 깊숙이 파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동서양 문화권을 넘나들며 수다의 변천과 정치적 파장을 파헤친‘수다의 매력’(새로운 사람들),키니네·면화·감자등의 역사적 영향을 고찰한 ‘역사를 바꾼 5가지 씨앗’(세종서적),화장실을 통해 인류문명의 뒤안을 추적한‘1.5평의 문명사’(푸른숲)등이 눈에 띈다.분야로는 ‘문화적 투쟁으로서의 성’(솔),‘욕망의 진화’(백년도서),‘포르노그라피의 발명’(책세상)등 성 관련서가 많다.다음달 나올‘죽음 앞에 선 인간’(동문선)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시대에 따라 죽음을 표현하는 양식에 주목한다.

올해 문화유산의 해와 겹치면서 풍토·음식등 고유의 생활문화를 파고든 책들도 러시다.밥·김치등의 미학을 파헤친 ‘식문화의 뿌리를 찾아서’(교보문고),돌에 담긴 문화저력을 풀어쓴 ‘돌나라 돌이야기’(맑은소리),조상들의 성의식을 복원한 ‘성,숭배와 금기의 대상’(대원사)등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고 있다.청년사는 10만여부가 나가며 생활사 읽기의 기폭제가 됐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이어 5월께 고려시대편도 내놓는다. 반면 국내 생활사 관련 서적출간은 아직 걸음마 단계.일본만 해도 시대·분야별로 거의 빠짐없이 일상의 전모가 책으로 엮어졌다.동문선 박재환기획실장은 “프랑스의 경우 아세트출판사의 일상생활 시리즈 하나만 해도 2백종을 넘어섰다”며 “국내 필자의 분발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충남대 김웅종(사학)교수는“서구학계에서도 마르크시즘이 촉발한 민중에의 관심이 이데올로기 대립이 약화되면서 생활 전반으로 옮아갔다”며 “엘리트가 이끈 역사가 아닌,기층문화·생활문화를 잣대로 한 역사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전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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