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를 나와 지방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딸(27)은 어려서부터 심장부정맥을 앓아 자꾸만 쓰러진다. 아들(24)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던 그의 부인(51)도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다. 이씨는 성당에서 배운 ‘수족침’을 아픈 가족의 발에 부지런히 놓을 뿐이었다. 이씨와 아내(51)는 모두 신용불량자다. 이씨 가족에게 혜택이 돌아가기에는 우리의 사회안전망은 엉성하다.
그는 “건강이든 교육이든 다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건데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해준 것이 없어 너무 미안하다”며 “기회가 온다면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해주는 게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오토바이 헬멧 사업에 매달린 지 16년째다. 용인시에 있는 그의 헬멧 공장은 축사를 개조해 만들었다. 말이 공장이지 직원도, 돈도 없다. 이씨는 “세계특허를 받을 정도로 기술에는 자신이 있는데 귀신이 자꾸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이동선씨가 14일 자신의 공장에서 헬멧을 조립하고 있다. 이씨는 16년째 오토바이 헬멧 사업에 매달리고 있지만 수입은 전혀 없다.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10년 넘게 병원에 못 간다. 수족침 도구(사진 오른쪽 아래)가 이씨 가족의 유일한 의료 수단이다. [강정현 기자]
이씨가 원래부터 ‘빈곤층’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의 명문고와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10년간 봉제 제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에 다녔다. 그러다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전시회에서 오토바이 헬멧을 보고 “봉제와 잡화를 생산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벌였다.
이씨는 아파트를 담보로 2000만원, 신용보증기금에서 8000만원을 대출받고 투자금을 유치해 헬멧 공장을 차렸다. 1322㎡(400평) 공장에 직원 13명을 이끌고 ‘라(LAH)’라는 독자 브랜드도 만들었다. 하지만 수출 대행업자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설비는 경쟁사에 고철값 정도인 1700만원에 넘어갔다. 이씨는 일본 제품을 능가하는 신제품을 만들겠다며 다시 재기를 꿈꿨지만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신용불량자로 떨어진 이씨로서는 제품 생산 자금을 빌릴 방법이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 떠난 공장을 이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헬멧 개발에 몰두했다. 이씨는 “사발면에 건빵을 넣으면 탱탱 불어 양이 많아지는데 그걸 먹으며 버텼다”고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씨는 기존 제품의 절반 이하 무게에 헬멧 내부에서 공기가 자유롭게 통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까지 받았다. 샘플을 만들어 해외 전시회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제품을 생산할 돈이 없었다.
이씨는 자금을 빌리러 중소기업진흥공단·중소기업청 등 융자받을 수 있는 기관을 모조리 찾아 다녔다. 그러나 거래 실적과 고용 인원 등을 제시해야 했다. 이씨는 “기술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런 조건이 맞지 않으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중소기업을 위한 융자 제도’라는 게 많이 있지만 결론은 담보나 보증인 없이는 융자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는 빈곤의 늪으로 빠진 이유를 불운과 함께 정부의 무관심에서 찾는다. 선진국처럼 현장 중심의 서비스가 이뤄진다면 자기 같은 ‘기술 있는 빈곤층’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공무원들이 현장(공장)에 나와 보고 융자 여부를 판단해 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요즘도 매일 공장을 찾는 이씨는 “지금도 상황은 완전히 바닥”이라고 말했다. 최근 소액 투자자들의 투자 약속을 받아 헬멧 공장을 돌릴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귀신’이 등장했다. 투자자들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약속을 취소한 것이다. 이씨는 “정부에서 내 피땀이 어린 특허를 담보로 돈을 좀 대출해 줬으면 좋겠다”며 "당장 이달 말까지 특허유지료 500만원을 내지 못하면 특허 일부가 취소될 판”이라고 호소했다. 다시 찾아온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그는 “조금만 도와주면 일어설 수 있다”며 “자활 의지가 있는 빈곤층을 도와주면 그들이 다시 사회에 기여를 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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