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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6.화엄석경.고려묘지.소상팔경시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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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데 내가 참여해 심의하는 분야는 금석.서예,그리고 전적이다.

이 세가지에 공통되는 것은 글씨다.서예는 곧 글씨를 감상하는 것이요,금석은 금속제품이나 돌에 글씨를 새긴 것이며 전적은 역사의 기록이나 문학작품.학술을 책에다 쓰거나 인쇄하는 것이다.따라서 그 자료적 가치가 중요함은 물론이나 그

내용을 읽기에 앞서 먼저 눈에 비치는 것은 글씨다.

그러므로 좋은 글씨를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심취되어 기뻐 어쩔줄 모른다.훌륭한 미술작품이나 감동적인 음악을 감상할 때 느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 문화유산들을 자주 접하며 깊은 애정으로 이들을 대하게 되는 소이(所以)다.

나는 신라시대의 화엄석경(華嚴石經),고려시대 고분들에서 발굴된 고려묘지(高麗墓誌),그리고 조선시대 안견(安堅)이 그린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대한 19인의 시권인'소상팔경시권(瀟湘八景詩卷)'등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가지를 꼽아

문화유산으로서의 글씨를 조명하려 한다.석경은 돌에다 옛 경전을 새긴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인 173년 유학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문자를 돌에 새겨 국립대학에 비치,학자들에게 표준이 되는 경전으로 참고하게 한 것이니 이것이 희평석경(熹平石經)이고 240년께 다시 만든 것이 정시석경(正始石經)인데

이 두가지는 모두 부서져 없어지고 파편 몇쪽이 현존하나 이것은 경전을 연구하는 자료로 매우 귀중하게 쓰인다.

837년 구경(九經)의 문자를 새긴 개성석경(開城石經)은 모두 2백27장인데 현재 완전히 남아있어 시안(西安)의 비림(碑林)에 보존돼 있다.

우리나라의 화엄석경은 신라때 화엄사를 창건하면서 화엄경 전문을 돌에 새겨 각황전(覺皇殿)의 내벽 사면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절의 창건 연대를 경덕왕 때(742~764)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히

호암미술관에 보존된 국보 화엄경 필사본에 경덕왕 13년(754)이라고

확실한 기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석경도 거의 같은 연대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국의 개성석경보

다 80여년 앞선 것이다.

또 화엄석경은 서지학적 관점에서 평가할때도 가장 오래된 간본이다.

이 석경은 조선 초기까지도 완전히 보존된 것을'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때 각황전이 불에 타면서 석경도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수만개의 파편이 되어 4백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많이

흩어졌다.현재 화엄사에 남아 있

는 것은 1961년 조사한 바로 1만4천여장에 달한다.

이 석경(經)은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귀중할 뿐 아니라 더욱 값진 것은 그

글씨다.화엄석경은 개성석경의 글씨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우수하며

석경으로서는 물론이고 많은 필사본 중에도 이 경을 능가할 만한 것은

없다.특히 호암미술관의 사

경이 글씨가 서로 비슷하며 연대도 동일한 시기여서 크게 흥미를 끈다.

어쨌든 파편으로 남았을망정 글씨와 조각이 함께 세계 최고의 문화재임에

틀림없다.1990년 보물로 지정되기는 했으나 일반에 전시되지 못하고

궤짝에 넣어져 화엄사의 한 밀실에 묻혀 있다.

나는 이것을 경의 원문과 대교해 그 일부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해

국내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외국학자에게도 널리 알리는 방법을 제의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속히 밀실에서 나와 빛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죽은 사람의 경력을 돌에 새겨 무덤에 넣는 것을 묘지(墓誌)라

한다.조선시대에 와서는 돌 대신 자기(瓷器)를 사용하기도

했다.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초기부터 고려 청자를 도굴하기

위해 많은 고분을 파헤칠 때 청자와 함께

나온 것이 고려 묘지다.

당시 총독부 박물관과 덕수궁 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약 2백점에 달한다.묘지는 대개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석재가 부식된

것을 제외하고는 다 읽을 수 있다.이로 인하여 고려사에서 빠뜨린

기록이나 잘못된 것을 보

충.수정할 수 있는 1차적인 자료가 되며 또한 글씨로도 고려 일대의

서예사 자료로 매우 귀중하다.

중국을 제외하고 이렇게 풍부한 역사와 서예의 자료로서의 묘지를 가진

나라는 없다.묘지는 현재 중앙박물관 지하창고에서 잠자고 있다.따로

묘지를 전시할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을 마련해 일반에 공개되기를 바란다.

조선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세종대왕 시대다.특히 문학과

예술의 대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국가기관인 집현전에 모여

저술.편집.주석등의 사업에 종사했고 개인의 집으로는 안평대군

이용(李瑢)의 무계정사에 모여 놀았다.

안평대군은 왕자로서 시문과 서화에 다 능하고 특히 글씨는 조선조를

대표할 명가(名家)다.풍류를 좋아하며 이곳에서 당대 명가들에 의한

시문.서화 작품들이 양산되었음이 여러 문집과 기록들에 의하여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일본 덴리(天理)대에 소장된'몽유도원도'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여기에 소개하려는'소상팔경시권'도'몽유도원도'와 같은

발상에서 제작된 것이다.

안평대군이 중국서첩에서 송(宋)의 영종황제가 쓴 소상팔경시를 보고

크게 흥취를 느껴 곧 안견에게 소상팔경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당시의

대가들에게 이 그림에 대한 시를 지어 각기 자필로 써내어 그림과 함께

두루말이로 장첩한 것이다.

제작된 연유와 취지에 대하여 집현전 부수찬인 이영서(李永瑞)에게

서문을 짓게 해 첫머리에 실었기 때문에 작성된 내용을 알 수 있다.작성된

연대는 1442년이요,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이영서와 함께

19인이다.그중에는 영의정 하연(河

演),우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위시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

)등도 다 들어있다.

다만 이 시권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이 없어졌다.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글씨가,도원도와 이 시권이 아니면 다른 데서는 한쪽도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여기에 다 모여 그대로 보존된 것은 큰 다행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찍 필자의 서재에 들어와서 간혹 친지들에게 공람해왔는데

1989년'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제5집에 전부 해설을 붙여 영인으로

소개한바 있고 최근 호암미술관 주최 '조선전기 국보전'에 내놓아 일반에

공개했다.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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